여우는 이어지는 침묵이 불편하면서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자신의 얘기를 계속 이어가자니 그의 분노를 더욱 자아낼까 무서웠다. 그렇다고 힘들게 길을 찾아와 별다른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물러서자니 억울한 마음이 여우는 들었다. 미처 타이칸을 바라보며 대답할 배짱이 생기지 않아 원숭이 방향으로 고개 돌려 말했다.
“왕국을 영영 떠난다기보다 잠시 제 길을 찾아 외부로 나가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가족이 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타이칸은 우리 왕국의 위대한 지배자이기에 작은 짐승의 꿈을 감히 물었습니다.”
여우가 꼬랑지가 닳도록 살려 달라 빌어 대화를 급히 마무리하길 바랐던 원숭이로서는 말을 이어가는 그의 대답이 달갑지 않았다. 타이칸의 더욱 분노하기 전에 작은 여우를 몰아쳐 정신을 차려주겠노라 원숭이는 생각했다.
“너희 여우 일족이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아느냐? 그건 타이칸께서 네놈들을 먹이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칸이 계시는 이 땅에 늑대들이 감히 발 붙여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있는 타이칸의 왕국이 아니었다면 네놈들의 삶은 피폐했을 것이다.”
원숭이의 말이 사실임을 모르지 않아 여우는 원숭이의 말을 끊지 못했다. 원숭이가 말을 이었다.
“평화로운 삶에 물들어 야생의 어려움을 모르는구나. 자연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아마 네놈 같은 여우는 타이칸의 끝을 통과하자마자 늑대의 밥이 되리라. 이제 우리 왕국을 떠난다고 하니 왕께서 더 이상 네놈을 돌봐줄 이유가 없으니 직접 여우를 사냥해도 되겠구나.”
모욕적인 언사를 이어가는 원숭이에게 여우는 마음의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원숭이를 바라보며 여우가 살짝 이빨을 드러내 위협해 보았다. 그 순간 호랑이가 여우를 가만히 바라보다 자리를 박차 힘차게 뛰어올랐다. 여우는 호랑이가 제 자리에서 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여우의 머리 위 하늘로 갑작스레 밤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당혹감에 급히 여우가 하늘을 올려보니 거대한 호랑이가 머리 위로 날아올라 거대한 몸으로 태양과 자신 사이를 가르는 것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 여우는 대낮에 해님과 달님이 만나 천지에 어둠이 내렸던 오래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해님을 달님이 천천히 잡아먹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낮이 밤처럼 캄캄해졌다. 어린 여우는 생전 처음 겪는 해괴한 일이 무서워 울부짖었다. 옆에서 엄마 여우가 따스한 말로 아들을 진정시켰다. 지금 자신의 머리 위를 노니는 타이칸을 보니 그날의 공포심이 가벼이 다가왔다. 마음을 진정시킬 엄마조차 지금은 없었다. 지금 함께여도 도움은 안되리라 여우는 생각했다.
쿵
여우의 등뒤로 묵직한 생명체의 낙하 소리가 울렸다. 기척으로 보아 악어 5마리가량 떨어진 위치로 여우는 추측했다. 여우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섣부른 육체적 반응으로 상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으며 타이칸을 마주 볼 자신도 차마 없었다. 혹은 그냥 여우는 몸하나 까닥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쓱
여우는 타이칸이 자신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소리를 등뒤로 들었다. 앞 발이 땅을 딛고 다른 발이 다시 그 앞발을 스쳐 지나는 모습이 여우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네놈과 나는.”
호랑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여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다가오는 거대한 기척을 따라 타이칸의 숨결마저 가까이 느껴졌다. 여우의 긴 꼬리 끝에서 등으로 뜨거운 기운이 타고 올라오는 것을 여우는 느꼈다. 신기하게도 여우의 작은 몸은 반대로 차갑게 식어갔다. 얼굴은 더욱더 하얗게 변해갔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먹는다. 약한 동물은 더 약한 동물을 먹는다. 그 외에 우리 삶에 무슨 법칙이 있는가.”
타이칸은 여우 뒤에서 거리를 서서히 좁혀왔다. 발소리가 점점 커지며 자신을 향해 조여올수록 여우는 더더욱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호랑이의 커다란 얼굴이 여우의 작은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의 육체가 다시금 여우의 해님을 가렸다. 둘의 몸이 하나로 포개졌다. 여우의 양 옆으로 호랑이의 앞발이 자리했다. 발 하나 크기가 여우 체구와 비슷했다. 여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타이칸의 숨소리 체감했다. 거친 짐승의 숨결이 매섭게 뜨거웠으나 그것이 도달한 작은 몸은 되려 차갑게 식어갔다. 둘의 온도 차가 서리가 되어 여우의 온몸에 내렸다. 타이칸이 살포시 고개만 숙여도 여우는 머리부터 속절없이 먹이가 될 운명이었다. 이 자리에서 속절없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우는 생각했다. 죽음은 소리 소문 찾아온다는 말을 여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죽음은 은밀하게 다가올지 몰라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천지를 흔들며 요란스레 찾아왔다. 다만 그 공포가 발산하는 굉음은 여우의 귓가에서만 맴돌았다. 타이칸이 말을 멈추면 시간이 멈춘 듯이 고요했다. 땅 위에 오직 여우의 심장 소리만이 들렸다.
“타이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우여. 내가 너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
호랑이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말이 길어지자 그의 입에서 침 방울이 여우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우는 침을 피하지도 닦아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자리를 지켰다.
‘아 나는 이렇게 죽는 건가. 내가 세상 무서운 줄 몰랐다. 내 꿈에 빠져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했구나. 누구를 탓하랴...’
이미 진작부터 망양한 한탄스러움이 밀려오는 여우였다. 원만했던 우샤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타이칸과의 대화도 순탄하게 이어지리라 막연하게 여우는 생각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여우의 아둔한 판단이었다. 여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원망하였다. 호기롭게 타이칸을 만나겠다고 큰소리치던 철없는 자신의 미련함이 부끄러웠다. 허나 곧 지금 당장 살아보겠다는 여우의 의지가 후회의 마음을 잠시 뒤로 밀어 보냈다. 지금 입을 잘못 놀렸다간 여우로선 후회를 느낄 기회마저 사라져 버릴 처지였다. 여우는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고자 집중했다.
‘타이칸은 이런 존재였구나. 이미 입에서 놓친 토끼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당당하게 말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