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12

by 달곰

여우가 크게 숨을 한번 내쉬었다. 커다란 두 귀가 미약하게나마 쫑긋하고 움직임을 찾았다. 귀를 움직이고 나니 여우는 마음에 일말의 평정심이 돌아왔다. 여우는 주둥이를 조심스럽게 벌려 보았다. 입을 떼었다 닫았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말을 꺼냈다.

“나의 작은 육신이 호랑이 발톱에 찢기고 송곳니 아래 깔릴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죽더라도 말씀하신 자연의 법칙인 약육강식의 흐름 아래 죽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죽으면 강함도 약함도 없고 오직 제 어리석음만이 남습니다.”

여우가 깍듯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말을 전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붙잡았다.

‘지금 자신을 죽이면 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방문했기 때문이고, 그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와 다르다는 건가. 당돌하지만 딱히 반론의 여지는 없구나.’

타이칸은 여우의 목덜미를 물어서 하늘 높이 흔들어 보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여우를 죽이면 그의 논리를 힘으로 누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원숭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타이칸은 원숭이들이 누구보다 빠르고 멀리, 무엇보다 쉽게 말을 전달하는 걸 알았다. 절대적으로 강력하면서도 마음이 넓은 관대한 지배자가 되기를 타이칸은 원했다. 호랑이의 강인함을 증명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인자함을 내세우는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왕국의 짐승들은 그의 용맹함을 가까이 몸으로 느꼈지만 왕의 자애로움은 알지 못했다.-애초에 그런 건 없었는지 모른다-타이칸은 적어도 무자비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호랑이는 쉽게 흥분하고 공격성을 드러냈지만 타이칸은 자신의 폭력적인 면모를 의도적으로 눌렀다. 발톱을 아껴 사용하고 이빨을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야만스러운 금수 취급은 피할 수 있으리라 왕은 생각했다. 타이칸은 이대로 여우의 목숨을 앗아가면 무자비한 왕으로 비칠까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무사히 여우를 보내주자니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무기력한 지배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기에 타이칸은 여우에게 위협을 가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했다. 호랑이는 고개를 숙여 여우의 귓가에 주둥이를 가져갔다. 타이칸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나의 의지가 곧 법이다. 내가 죽음을 말하면 네 삶은 여기서 끝이다. 미천한 여우여. 그뿐이다. “

“……”

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우의 침묵이 자신의 말에 찬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반대를 피력하는지 타이칸은 알지 못했다. 여우는 왕의 말에 반은 동의했다. 그가 여기서 자신을 죽이겠다 마음먹으면 여우의 목숨은 더 이상 연명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여우는 그가 세상에 둘도 없는 절대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우는 호랑이의 우람한 턱 그 바로 아래에서 왕의 시선을 함께 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원숭이 쪽을 바라보는 타이칸의 시선을 여우는 느꼈다. 그 순간 여우는 왕의 망설임을 읽었다. 타이칸이 작은 동물의 생사를 두고 고민하고 있음을 여우는 알았다. 지금 괜한 말을 보태 다른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 여우는 함구했다. 침묵은 타이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여우에게는 최고이자 유일한 선택이었다.

타이칸은 여우의 얼굴을 한번 핥아 보았다. 호랑이는 여우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접었지만 이대로 물러서 체면을 구기기 싫었다. 지배자의 본능이 작은 동물을 위협해야 함을 상기하였다. 위협의 표현으로 혀를 놀리니 막상 자신도 모르게 허기가 올라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생사를 반신반의하던 여우는 다시 죽음을 떠올렸다.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호랑이가 고개를 들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앞으로 걸어갔다. 여우는 머리 위로는 타이칸의 거대한 육신이, 발아래로는 어둠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숨죽여 기다렸다. 잠시 뒤 호랑이의 거대한 배가 여우의 머리를 누르며 지나갔다. 이어서 뒷발이 지나가나 싶더니 어지러이 움직이는 호랑이 꼬리가 여우의 오른쪽 어깨를 쳤다가 왼쪽 뺨을 후려쳤다. 몸이 세차게 흔들렸지만 여우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빨리 타이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떠나가라. 나는 여우에게 관심 없다.”

“…”

왕이 자신의 동굴로 서서히 돌아가며 말을 이었다.

"다만 다시 마주하는 그날엔 네놈을 먹이로 삼겠다."

"…"

호랑이는 뒤로 단 한 번의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서서히 계속 걸었다.

“사라져라. 살려주겠다는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


마지막 말을 끝으로 호랑이는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여우는 끝까지 타이칸의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 미처 대답할 용기조차 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침묵했는지 본인조차 몰랐다. 울부짖는 왕좌의 동굴 안 어둠 속으로 호랑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여우는 꼼짝하지 않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호랑이 꼬리까지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약간의 안도감이 여우는 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원숭이가 여우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섰다. 왕이 사라지자 주변 공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원숭이도 마음에 여유를 되찾았다.

"용감한 건지 바보인지 모르겠다. 여우여. 황당하다. 네 꿈 이야기도 왕을 만나겠다는 멍청함도 모두."

"너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 행동이 아니다."

가장 큰 위기를 갓 넘긴 여우는 원숭이를 재차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울부짖는 왕좌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원숭이 우두머리 샤프먼 조차도 이런 당돌한 일은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모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겠구나. 원숭이들은 재미난 얘기를 좋아하지. 고맙다 여우여. 그리고 축하한다. 감사해라 살아있음을."

방금 전의 긴장감이 어느덧 얼굴에서 사라지고 재미난 구경에 신이 난 표정으로 원숭이가 말했다.

‘원숭이 우두머리 샤프먼에게 오늘 일을 말하려나 보다. 왕국의 동물 중에 가장 지혜롭다는 샤프먼… 원숭이들은 말을 쉽게 전달하지.. 곧 왕국을 떠나겠다는 여우 소문이 돌겠구나.’

조용한 왕국이라 동물들 사이에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여우는 그런 말들을 딱히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그는 엄마 여우가 오늘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원숭이에게 지금 벌어진 일을 비밀로 묻어 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다. 원숭이가 부탁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오히려 원숭이를 자극하여 더 입을 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우는 원숭이의 말을 뒤로하고 울부짖는 왕좌를 등지고 걸었다. 발길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여우는 어느덧 도망치듯 달렸다.
다급히 사라지는 여우를 향해 원숭이가 멀리서 소리쳤다.


“모든 짐승은 저마다 타고난 분수가 있는 법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길 바란다, 여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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