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리굴에서 아침을 맞이한 여우는 눈을 뜨자마자 발길을 보채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하늘길의 여정에 오르기 위해서 그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시급했다. 자신의 꿈과 길을 떠나고자 하는 의지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짐승들의 견해를 수집해야 했다. 이미 첫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타이칸의 의견을 청취하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함만이 가득 담긴 하루였다. 여우의 눈에 왕은 자신 외에 다른 생명들에 무관심해 보였다. 적어도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분명하였다. 어제 일을 되새겨 보자니 호랑이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우를 괴롭히는 건 호랑이의 무서움이 아니었다. 지난날 타이칸의 왕좌에서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모두 어제의 것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을 하찮게 바라보는 호랑이의 싸늘한 표정과 뒤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무심한 왕의 태도가 여우를 괴롭혔다. 눈앞에서 몰아치던 맹수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자신을 뿌리 채 무시하던 치욕의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여우의 마음에 아픔을 더했다.
'지나간 일을 돌이키지 말자. 나에겐 가야 할 길이 있다. 그것에 집중하자.'
여우는 마음을 고르고 길을 나섰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어느 동물을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이러다 원숭이들이 먼저 말을 퍼트리겠구나. 꿈을 찾아 길을 떠나겠다는 바보 여우 이야기를 신나서 하겠지.’ 말 옮기기 좋아하는 원숭이를 떠올리며 여우는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그는 생각했다.
'잠깐… 어차피 원숭이 종족은 조만간 내 이야기를 모두 듣겠지. 그렇다면 내가 먼저 찾아가서 그들에게 생각을 물어보자. 이왕 의견을 묻는 다면 우두머리인 샤프먼과 대화하는 편이 좋겠다. 샤프먼은 원숭이 무리에서 가장 힘이 강하고 영리하다고 들었어. 남다른 이야기를 들려줄지 몰라.'
문제는 원숭이 무리가 어디에 머무는지 여우는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원숭이들은 항상 무리를 지어 활동했다. 삶의 터전으로 삼는 근거지가 있었으나 먹이를 찾아 단체로 이동하여 소굴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원숭이 서식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으나 여우로서는 지금 그들이 어디 위치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숭이들이 어디 있는지 누가 알고 있을까… 그래! 코끼리는 알지도 몰라. 원숭이가 빠르고 영리하다면 코끼리는 우직하고 지혜롭지. 그들의 거대한 덩치는 눈에 띄어 찾기도 쉽고. 엄마 호수에 가서 기다리면 목마른 코끼리 한 마리를 발견할지 몰라. 코끼리를 찾아 원숭이 무리의 행방을 묻자.‘
목적지를 정하자 여우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평소에도 군더더기가 없는 행동을 보인 여우였다. 먹이를 잡을 때에는 최단 거리로 행선지를 설정하고 가장 빠른 길로 이동했다. 먹이를 발견하면 주위의 위험을 잠시 살펴보고는 속전속결로 먹이를 사냥했다. 먹이 포획에 성공하면 신속하게 식사를 즐기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사냥에 실패하면 미련 없이 더욱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최근 그의 행보는 더욱 분명했다. 여우는 자신만의 길을 떠나가기 위한 최단 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엄마 호수를 찾아 나서는 길은 언제나 설렘과 동시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타이칸 왕국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는 다양한 생명자원의 보고였다. 호수 내부에도 다양한 수중 생명체가 살았지만 물가 인근에도 수분이 풍족하여 다양한 풀이 자랐다. 목을 축여 생명을 보존하고 먹음직한 풀을 맛보기 위해 많은 동물들이 호숫가를 찾았다. 잡초를 뜯으며 배를 채우는 짐승을 다른 짐승이 굶주린 배를 추스르며 노려 보았다. 엄마 호수는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언제나 긴장을 놓치기 어려운 곳이었다. 여우는 길을 가다 마주친 산딸기를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토끼 사냥에 실패한 이후로 여우는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여우는 나뭇잎 사이로 서너 개씩 열린 빨간 열매들을 정신없이 뒤척이며 기다란 주둥이 안에 밀어 넣었다. 딸기 과즙이 입안을 적시자 두려움과 긴장감의 틈바구니 사이로 밀어두었던 허기가 거칠게 올라왔다.
‘산딸기가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구나. 평생 이것만 먹어도 살 수 있겠다.’
목적지도 잠시 잊고 여우는 굶주린 배를 딸기로 가득 채웠다. 인근 딸기를 모조리 사냥하여 여우 입 주변 털이-여우는 전신은 전반적으로 붉은색을 띠었지만 입 주변과 배 부위는 하얀 털이 이어져 있다- 딸기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여우의 네 발에 다시금 힘이 솟아났다. 엄마 호수를 향해 속도를 높여 여우는 달렸다.
커다란 나무 틈으로 엄마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울창한 나무숲이 끝나며 강렬한 햇살이 순수하게 땅과 물에 닿았다. 호수의 물결에 햇볕이 반사되어 여우의 눈에 닿았다. 여우는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했다. 나무를 넘어 숲의 경계를 나서면 호수의 시작됐다. 반대편 물가가 힘겹게 겨우 보일 정도로 드넓은 호수였다. 호수 주변에는 우거진 풀이 무성했지만 여우의 몸을 가려줄 바위가 나무가 많지 않았다. 숲을 나서면 여우의 모습이 다른 동물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다.
무슨 동물들이 어디서 나타날지, 혹은 여우를 예의주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건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타이칸의 땅에서 늑대가 출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물가에는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천적이 존재했다. 얼룩말에서부터 작은 새끼 사슴까지 악어는 호수에서 목을 축이는 짐승이라면 크기를 가리지 않고 사냥했다. 하늘에서는 독수리가 종종 출몰하였다. 타이칸이 왕국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하늘은 언제나 그들의 영역이었다. 엄마 호수는 인근의 모든 짐승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동시에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물가에서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여우의 눈에 보였다. 성인 코끼리는 호랑이보다도 곱절 이상 컸다. 얼굴 양 옆에는 위협적으로 솟아 난 상아가 보였다. 수컷 코끼리였다. 코끼리는 코에 가득 머금은 물을 몸에 거듭 뿌리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커다란 귀를 끊임없이 팔랑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몸에 들러붙은 벌레들은 쫓아내는 움직임조차 거대하고 역동적이었다.
‘무리와 같지 있지 않는 걸로 보아 성인 수컷이구나. 사나운 시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코끼리는 암컷과 어린 새끼를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수컷 새끼는 자라서 성인이 되면 무리를 떠나 독립하여 홀로 생활했다. 다 큰 성인 수컷은 오직 다른 생명을 잉태할 때만 무리를 다시 찾았다. 그 시기의 수컷 코끼리들은 사나워 타이칸조차 마주하면 길을 피했다. 주변에 다른 코끼리는 없었다. 무리를 이끄는 헤리티아와 다른 암컷 무리는 새끼들과 함께 먹이를 찾아 다른 지역에 머무르고 있다고 여우는 생각했다. 여우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코끼리에게 다가섰다. 여우는 코끼리의 몸을 한눈에 겨우 담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섰다. 그는 여전히 온몸이 간지러워 참기 어려운 듯 계속해서 힘차게 발을 구르고 큰 귀를 펄럭였다. 발 구르며 튀긴 흙들과 땅을 흔드는 진동이 동시에 여우의 귀를 때렸다.
‘저 발에 밟히면 내 짧은 생은 덧없이 사라지겠구나.’
코끼리는 여우보다 10배는 긴 삶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들이 자신보다 크기 때문에 오래 사는 것인지, 오래 살 수 있어서 거대해지는 것인지 같은 불필요한 궁금증을 여우는 머리에 떠올렸다.
‘타이칸 말 중에 옳은 것도 있다. 타고남이 다르다.’
거대한 존재에 대한 경외로운 시선을 걷어내고 여우는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다. 여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코끼리의 움직임에 묻히지 않도록 크게 울부짖어 물었다.
“코끼리여. 묻고 싶은 게 있으니 잠시 나를 봐주세요.”
… 쿵쿵…
코끼리는 여우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우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외쳤다.
“거대한 존재여! 잠시 이곳을 봐주세요!”
거대한 짐승이 작은 소리를 감지했는지 멈춰 섰다. 귀를 세차게 움직이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시선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자 다시 몸을 숙인 코끼리가 마침내 여우를 발견했다.
"… 지금 나를 부른 것이 여우 그대인가?”
“그래요. 궁금한 것이 있는데 답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 다른 날에 오라."
코끼리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더위를 쫓는 게 아니라 눈물을 쓸려 보내고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몸의 벌레를 떨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몸을 둘러싼 슬픔을 물리치고자 떨었다. 여우는 단번에 코끼리의 슬픔을 읽었다. 왠지 마음의 아픔조차 거대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대단히 슬퍼 보이는데요…“
“……”
코끼리는 바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여우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어머니이자 코끼리의 지배자 헤리티아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고 싶지만 나는 무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답답함을 해결할 길이 없다.”
여우는 굴에 있는 엄마가 생각나 그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했다.
“많이 속상하겠군요. 마음이 어지럽겠어요. 힘을 내세요.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게요."
말을 마치고 여우는 코끼리의 마지막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말을 마치면 여우는 뒤를 돌아 다른 방법을 찾아가려 했다. 코끼리는 여우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공감을 느꼈다.
"… 괜찮다. 그게 성장한 수컷 코끼리의 운명이다. 말하고 싶은 바를 꺼내라 여우."
“고마워요. 나는 원숭이 무리를 찾고 있어요. 혹시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아나요?”
“원숭이…? 왜 굳이 그 놈들을 찾아가려 하는가?”
코끼리가 커다란 얼굴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뭐 다 이유가 있겠지. 원숭이 무리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는 길에 새끼 원숭이 몇몇이 내 배변에서 먹을 걸 구하는 게 보였다. 가서 그들에게 물어보라."
"… 그게 어디인가요?"
"호수 반대편에서 찾을 수 있다."
“… 감사합니다. 마음이 너무 괴롭지 않기를 바랄게요."
"고맙다. 길을 가라 여우여."
여우는 주변을 살피며 물가 반대편을 향해 이동했다.
‘코끼리 똥을 찾아, 그 똥을 먹는 짐승을 따라, 그 짐승의 소굴로 가는구나.’
여우는 희한한 행선지로 가야만 하는 스스로가 문득 우스웠다. 잠깐의 미소가 스치고 여우는 주변을 더욱 경계했다. 호수 반대편까지 제법 길이 멀었다. 여우는 그나마 높게 자라 몸을 숨길 법한 풀 속으로 최대한 자신의 밀어 넣고는 부지런히 발을 재촉했다. 호수 맞은편으로 가는 길에 여우는 한적하게 목을 축이고 있는 사슴 무리를 발견했다. 무리의 중심에서 떨어져 주변을 살피던 사슴 몇 마리가 여우를 발견했다. 잠시 불안한 눈초리로 여우를 바라보다 작은 짐승임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여우는 행여나 사슴 무리를 노리는 다른 포식자가 있는지 주위를 재차 살피느라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인근에 다른 짐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슴을 따라 여우도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원숭이를 놓칠 세라 여우는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