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15

by 달곰

호수 맞은편에 다다라서 여우는 어린 원숭이 두 마리를 찾았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왔다가 엄마 호수에 오게 됐다. 그들은 먹는 즐거움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여우가 지척의 거리에 접근하여도 원숭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코끼리 배설물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열매 씨앗을 골라먹었다. 거대한 코끼리가 지나가며 만들어 낸 움푹 파인 발자국 안에는 노출된 풀뿌리나 벌레가 많았다. 코끼리의 발자취는 풍부한 먹거리를 남겼다. ‘내가 호랑이나 늑대였으면 좋겠구나. 이렇게 손쉬운 사냥감이 있다니.’ 쉬지 않고 손을 입으로 향하는 어린 원숭이의 등을 바라보며 여우는 생각했다. 작은 여우에게 어린 개체라도 원숭이는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였다. 어차피 지금은 사냥이 목적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까악..!

가까운 거리에서 잡초를 먹던 원숭이가 놀라 소스라치며 소리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상대적으로 먼발치에 있던 원숭이도 그 모습에 놀라 덩달아 뛰어올랐다. 먼저 도망쳤던 원숭이가 몇 발 가지 않아 뒤를 보더니 소리의 발단이 여우였음을 알아챘다. 원숭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다리로 여우에게 발길을 돌렸다.

“뭐야. 여우잖아. 깜짝 놀랐네.”

원숭이가 몇 발자국 여우를 향해 더욱 다가섰다.

“놀라게 했으면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다만 물어볼 것이 있어요.”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원숭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서더니 여우의 귀 끝에서부터 발바닥까지를 눈으로 빠르게 두어 번 훑었다. 그러더니 손을 가지런히 하여 평평히 한 뒤 자신의 머리에서부터 여우 귀까지를 이었다. 원숭이의 손이 여우에게 다가설수록 땅을 향해 슬며시 내려갔다. 그는 여우가 자기보다 작은 생명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우월감에 빠져 우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우는 눈빛으로만 원숭이를 쫓았다.

‘원숭이는 어린 새끼들 조차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한결같은 종족이다.’

“말해보아라, 여우.”

원숭이가 한껏 우쭐해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뒤에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다른 원숭이도 살며시 여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상대는 작은 짐승이고 자신들은 수적 우위에 있다고 원숭이는 생각했다. 여우는 두 원숭이의 생김새가 닮았기에 형제 일거라 추측했다. 여러 다른 원숭이들이 눈앞에 있어도 각각의 생김새를 구별할 수 있는 여우였지만 그들의 성별을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형제가 아닌 자매이거나 남매 일수도 있었다. 자신 앞에서 말을 건네는 원숭이의 덩치가 좀 더 컸기에 형 일거라-혹은 누나이거나 언니 거나- 여겼다.

“당신들 원숭이 무리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세요. 샤프먼에게 할 말이 있어요.”

“우리 은신처로 같이 가자고…?”

형 원숭이는 느닷없는 여우의 요청에 의아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살면서 그와 유사한 요청도 들어보지 못했다. 일족의 서식지로 순순히 안내하라니. 그가 만약 5년 혹은 10년 더 세월이 묻은 원숭이였다면 온 힘을 다해 여우를 비웃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원숭이는 아직 삶의 경험이 많지 않았다. 부족한 경험은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형 원숭이는 아우가 있는 쪽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여우가 들리지 않게 귓속말로 둘은 얘기했다.

“들었나? 은신처로 안내하라고 말한다. 저 여우가.”

“들었다. 샤프먼을 만나겠다고, 여우가.”

“무리에 위협이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작다 여우는 아주.”

“작다. 우리를 먹을 수 없다. 우리가 먹을 수는 있다.”

“그래, 여차하면 먹이로 삼으면 된다.”

“그래, 여차하면 먹으면 된다.”

어른 원숭이들이 작은 짐승을 먹이로 삼는 걸 형제들은 자주 목격했다. 원숭이 무리는 들판에서 함께 생활하던 가젤 무리와 서로를 챙기며 잘 지내다가도-포식자가 나타나면 서로 알려주거나 하면서- 어린 가젤이 잠시 무리에서 떨어지면 몰래 사냥했다. 그들은 잡식성이었다. 땅에서 나는 풀뿌리, 벌레에서 시작하여 나무 열매, 과일, 같은 짐승 까지도 닥치는 대로 먹었다. 여우를 우선 무리에 데려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성인 원숭이들의 식사로 줘버리면 그만이라 원숭이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도 이번 기회에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생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형 원숭이가 여우 앞으로 다가섰다.

“좋다, 여우여. 우리와 함께 간다. 따라오라.”

원숭이들은 여우에게 순수하게 길을 안내했다. 형이 먼저 앞장섰고 그 뒤를 아우가 따랐다. 여우는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길을 나설 때 여우는 원숭이 무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찾으러 가야 하는지 전혀 몰랐었다. 예상보다 헤매지 않고 길을 찾게 되어 다행이라 여우는 생각했다.


원숭이들은 요란스레 길을 나아갔다. 그들은 두 발로 걷다가 네발로 뛰기를 번갈아 반복했다. 자연스레 행진 속도도 늦춰졌다. 길을 가다 땅에 먹음직한 풀이 보이면 멈춰서 입으로 가져갔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해 옆에 놓인 나뭇가지에 열린 열매를 따서 먹었다. 둘이서 사이좋게 먹다가 어느 틈에 서로 털을 골라주었고, 털을 고르다 갑자기 서로 티격태격 다투었다.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에 여우는 답답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둘의 행태를 지켜만 보았다. 형제의 싸움인지 장난인지가 다소 길어진다 싶으면 다가서서 나지막이 제지할 뿐이었다.

“… 저기. 우리에겐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

“알겠다. 성격 급한 여우. 우리 간다.”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여 못마땅해진 형을 대신하여 아우가 답했다. 형 원숭이는 여우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지만 불만의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금 먼저 길을 나섰다. 이번에도 동생이 뒤를 따랐다. 여우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답답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원숭이들은 또 어찌나 더디게 길을 가는가.’

여우는 답답한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일행은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숲과 숲 사이의 작은 들판을 건넜다. 시원한 바람이 여우를 타고 지나갔다. 붉은 털이 들판의 잡초들과 함께 나부꼈다. 들판의 풀들이 바람과 함께 춤추는 것을 여우는 눈으로 함께 했다. 들판이 끝나고 다시 숲이 시작되는 경계선에서 형 원숭이가 발을 멈췄다. 여우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두고 뒤로 검은 대나무 숲이 무성했다. 대나무가 촘촘하게 자리하여 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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