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17

by 달곰

“여우다….!”

“원숭이 절벽에 여우가 왔다.”

쳐다보는 시선이 늘어남에 따라 웅성거리는 소리 또한 점점 높아졌다. 웅성거리는 진동 소리가 진동 여우의 가슴에 닿았다. 가슴 두근 거리는 긴장감이 여우를 찾았다. 전날의 공포가 하나의 짐승이 발산해 낸 위협이 기인했다면, 오늘은 다수의 짐승이 공명하듯 조여 오는 떨림이 두려웠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크게 숨을 쉬고 나서 여우는 절벽 위 원숭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밀려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을 가능한 한 제어하고자 했다. 마음을 다스리며 절벽을 둘러보던 여우는 다소 동 떨어져 패거리를 발견했다. 절벽 중간쯤 건장한 원숭이 다섯 마리가 무리를 이뤄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네 마리가 앉아 있는 가운데 원숭이 하나가 서서 강렬한 눈빛으로 여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갈색 털로 감싸 있었는데, 눈가에 자리 잡은 검은 반점이 매서운 인상을 더했다.

‘절벽 중간에 자리 잡은 무리가 샤프먼에게 반발하는 원숭이구나. 검은 반점이 그들의 리더인가 보다. 샤프먼도 그렇고 검은 반점도 강인해 보인다.‘

여우의 마음이 미처 진정되기 전에 보초원숭이와 여우는 어느덧 절벽 앞에 다다랐다. 그들이 절벽 앞에 멈춰 서자 원숭이들의 흥분 상태가 절정에 올랐다. 여우를 구경하고자 모두 절벽 낮은 곳으로 뛰어 내려와 앞으로 다가서려 했다. 오직 샤프먼과 검은 반점의 무리만이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하고 자리를 지켜라!”

절벽 아래를 내려보며 샤프먼이 외쳤다. 원숭이들이 일순간에 모두 말을 잃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벽 위 우두머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샤프먼이 목소리를 내고자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기에 여우는 그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갈색보다 검붉은 색에 가까운 털이 그를 감싸 안아 온몸이 더욱 부풀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체구를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리게 보이게 해 더욱 큰 위대한 무언가로 느끼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보초 원숭이가 외쳤다.

“샤프먼이여. 여기 이 여우가 당신을 만나고자 찾아와 절벽으로 안내했다. 어제 타이칸을 만난 그 여우다."

절벽 아래 원숭이들이 작은 소리로 웅성댔다. 전날 보초 원숭이와 같이 여우 이야기를 들은 원숭이들보다 내용을 모르는 일부의 목소리가 더욱 컸다.

"타이칸을 만난 여우라고? 여우가 호랑이를 찾아갔다고?”

조용히 하라는 우두머리의 명이 있었기에 수근 거리는 소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우는 자신을 바라보는 원숭이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보초 원숭이가 순수하게 자신을 우두머리 앞으로 데려온 이유도 조금은 알 듯했다. 어제 타이칸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오늘 샤프먼과의 만남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여우는 생각했다. 전날 죽음의 고비를 넘김으로써 여우는 다른 평범한 여우들과는 이미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원숭이들의 우두머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두가 궁금했다. 여우와 모든 원숭이들의 시선이 샤프먼의 주둥이를 향해 위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여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네가 그 여우인가. 나를 찾아온 이유를 말하라.”

“고마워요, 샤프먼. 나의 꿈에 대해 말하고 원숭이 우두머리인 당신의 생각이 구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여우는 소리가 위에 까지 닿을 수 있도록 힘껏 외쳤다. 절벽의 모든 짐승들이 둘의 대화를 들었다.

“꿈…? 무슨 꿈이 길래 내 의견이 궁금하단 말인가.”

잠시 숨을 고른 뒤 여우가 대답했다.

“얼마 전부터 하늘의 별을 타고 달리는 꿈을 꾸어요. 꿈은 몇 날이 계속된 적도 있고 한동안 찾아오지 않는 날도 있지요. 그렇게 한동안 꿈이 지속되다 며칠 전 우연히 하늘을 달리는 여우를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은빛 털이 아름다운 여우이며 자신의 이름을 우샤인이라 소개했습니다.”

우샤인의 이름이 나오자 원숭이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명백한 비웃음의 의미였지만 여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하늘을 달리는 방법을 들었다. 이제 그 길을 찾아 이 땅을 떠나고자 한다. 샤프먼, 당신은 원숭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현명하다고 알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당신의 조언을 구하고 싶다.”


여우 말을 듣던 검은 반점이 자기 무리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샤프먼이 되겠다는 내 꿈은 소박해 보이는구나.”

검은 반점 무리가 자기들끼리 키득대며 웃었다. 절벽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원숭이들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반면에 대부분의 다른 원숭이들은 대화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원숭이에게 지금 상황은 대단히 신기하면서도 재미난 일이었다. 오가는 이야기가 너무도 허무맹랑 하기에 오히려 흥미를 끌었다. 호기심 가득한 짐승들의 귀가 다시 샤프먼을 향했다.

“여우가 하늘을 달린다니 무슨 헛소리인가. 여우는 우리 원숭이 보다도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봤어요! 우샤인은 자신만 볼 수 있는 길을 따라 하늘을 걸었어요. 또한 모든 동물에게는 각자의 하늘길이 있다고 알려 주었지요. 그 길을 나설 수 있는 첫 디딤돌을 찾아내면 모두가 하늘을 달릴 수 있다고 했어요."

"한 번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이름 있는 여우라니. 그런 것은 없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과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왜 내 말을 믿지 못하는가요, 샤프먼!.”

여우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지만 한결같은 동물들의 반응에 마음이 답답했다. 또한 전날 타이칸의 면전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우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응어리지고 답답한 마음이 여우의 마음 안에서 점점 화로 번져갔다. 샤프먼 역시 호랑이를 직접 찾아간 여우 이야기를 쉽게 믿지 못했다. 이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스스로 듣고 보니 전날 울부짖는 왕좌에서 있었던 사건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여우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제 발로 타이칸을 찾아 나선 것부터 이미 정상적인 짐승의 행동이 아니었다. 절벽 위에 보는 눈이 많았다. 샤프먼은 여우에게 따끔한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네가 지금 야생의 삶이 치열하지 않고 먹을 것이 풍족하여 정신을 잃었구나. 여우이던 원숭이던 배를 굶주리고 맹수에게 쫓기며 살아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여우를 내려보던 샤프먼의 눈이 잠시 검은 반점에게 머물렀다. 검은 반점 역시 머리 위로 그 시선을 읽었지만 무심하듯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가 시선을 다시 여우를 향하며 말을 이었다.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짧은 여우의 삶을 허비하지 마라, 작은 짐승이여. 여우로 태어나서 타이칸의 땅, 이곳보다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너무 살만하니까 허튼 상상으로 여유로움을 채우는구나. 이곳을 떠나 타이칸의 규칙 없는 세상에서 여우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네놈은 하루도 못 가 다른 짐승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냉혹한 현실에 눈을 떠라. 여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샤프먼의 말에 여우는 오기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면 여우의 꿈은 여기서 무너질 것만 같았다. 여우는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무슨 근거로 내 이야기를 하찮게 만드는가, 샤프먼!”

“네놈은 여우다. 여우는 호랑이도, 독수리도, 하물며 원숭이도 될 수 없다. 여우는 여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모습이 성에 차지 않아 네가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늘을 나는 네 꿈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로서의 모습을 인정하라. 꿈에서 깨어라 여우여.”

샤프먼의 말이 잠시 끊기자 원숭이들은 여우의 대답을 흥미롭게 기다렸다. 여우는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는 자와 아무런 대화도 이어갈 수 없었다. 얼핏 들어도 샤프먼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다만 여우는 이 땅의 현실과는 다른 꿈을 꾸었다. 이 세계의 법칙이 세상의 전부인 짐승에게 자신의 꿈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다.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샤이를 데려와 직접 눈앞에서 보여주거나, 자신이 우샤이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샤프먼이 보태어 말했다.

"여우는 여우의 자리를 지켜라."

생각을 달래며 다음 말을 고르던 여우의 눈빛에 순간 적의가 일었다.

‘어제 타이칸의 왕좌에서도 원숭이가 같은 이야기를 했지. 여우의 자리를 지키라니. 나의 한계를 왜 마음대로 평가 내리는가.’

여우의 분노는 곧 말이 되고 기분은 행동이 되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여우가 말했다.

“원숭이의 삶은 어떨지 몰라도 여우의 삶을 맘대로 재단하지 마라, 샤프먼.”

여우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공격성을 보이자 절벽 아래 있던 원숭이들이 흥분하였다.

“여우가 이빨을 보였다. 원숭이의 절벽에서 감히 송곳니를 보였다!”

“건방진 여우다. 여우를 혼을 내자!”

샤프먼을 바라보며 둘의 대화를 묵묵히 듣던 보초 원숭이조차 살기 어린 표정으로 여우를 내려 보았다. 다만 그는 다른 원숭이들처럼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성난 원숭이 무리에서 여우를 지켜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절벽의 기류가 순식간에 적대적으로 바뀌는 것을 여우는 눈치챘다.

'경솔하게 행동하면 안 되겠구나. 원숭이들은 감정기복이 유독 심한 짐승이라 작은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여우가 자성의 목소리를 속으로 되뇌었으나 이미 주변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네놈이 타이칸을 만나 운 좋게 살아남더니 호랑이가 된 것 마냥 기고만장하는구나.”

샤프먼이 여우를 향해 거칠게 말을 내뱉었지만 그 이상의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실 여우를 깊게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타이칸을 스스로 찾은 짐승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지만 막상 여우는 터무니없는 소리만을 늘어놓았다. 여우가 건방지다고 해서 굳이 절벽 아래로 몸을 내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작은 짐승을 혼낸다고 해서 무리에 강인한 지배자의 모습을 심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최근 절벽 중간에서 무리를 이뤄 서성이는 검은 반점 일당이 신경 쓰였다. 절벽 돌 층계의 최상층은 지배자의 권력을 상징했다. 그곳은 언제나 샤프먼의 자리였다. 샤프먼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자리를 비우지 않고자 했다. 자신의 권력을 향한 반동 세력이 언제나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것을 샤프먼은 알았다. 적당히 상대하여 여우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는 생각보다 완강하게 행동하고 성가시게 굴었다. 샤프먼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짐승의 삶은 짧다. 여우의 생은 더욱 그렇다. 무례함을 용서할 테니 떠나라.”

귀찮다는 듯이 자신을 내치는 샤프먼의 태도에 여우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 사이에서 샤프먼과 언쟁을 계속하는 건 여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우는 의견을 물어보았고 샤프먼은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답했다. 사실상 여우는 자신이 원숭이들의 절벽을 찾은 목표를 달성하였다. 단지 원하는 형태의 내용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여우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여우는 이제 원숭이들 사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시를 받은 분한 마음에 샤프먼을 바라보고 잠시 낮게 으르렁대었을 뿐 여우는 발길을 돌려 절벽을 벗어나고자 했다.


여우와 샤프먼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검은 반점은 사태가 싱겁게 마무리되기를 원치 않았다. 최근 절벽의 일상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이러한 일상의 안락함 속에선 우두머리를 교체할 명분이 없었다.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어야 원숭이 무리의 불만도 이끌어내고 여론을 형성할 텐데 절벽의 매일매일은 단조로웠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벤트가 짧게 끝나기를 그는 원하지 않았다. 검은 반점은 절벽 아래의 원숭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샤프먼! 원숭이 절벽에서 샤프먼에게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을 그냥 보내려고 하는가!”

검은 반점은 말하고 나서 자신의 앞에 있는 원숭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손끝으로 전해진 생각을 읽은 듯 원숭이가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샤프먼을 바라보며 외쳤다.

“원숭이의 지배자를 무시하고도 무사히 보낼 것인가! 당신은 체면이 중요하지 않은가 샤프먼!"

두 원숭이의 외침이 절벽 아래 군중에게 불을 붙였다. 흥분한 원숭이들은 제각각 분노의 말들을 뱉어 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몸을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여우를 잡아서 혼쭐 내라!"

"샤프먼을 무시했다, 샤프먼은 여우를 죽여라!"

격양된 외침들로 이제 절벽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샤프먼은 더 이상 말로 무리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격분한 원숭이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행동을 취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보초 원숭이나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원숭이들에게 여우를 적당히 혼내주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우가 이빨을 드러내 보인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지배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도전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는 절벽 꼭대기 끝에 올라서서 얼굴을 구긴 채 여우를 노려 보았다. 샤프먼의 거대한 체구가 드러나자 원숭이 무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성큼성큼 돌 층계를 뛰어내렸다. 샤프먼의 심복 원숭이 세 마리가 그의 뒤를 따라 층계를 내려왔다. 절벽 중간쯤에 이르러 샤프먼은 검은 반점 무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샤프먼이 잔뜩 노한 얼굴로 검은 반점을 잠시 노려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절벽을 마저 내려갔다. 검은 반점은 샤프먼의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우두머리 무리가 모두 절벽을 내려가고 난 뒤에야 검은 반점 일당들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기다려라, 여우여. 샤프먼이 온다.”

자신의 우두머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보초 원숭이가 여우를 막아 세웠다. 여우가 몸을 다시 뒤로 돌려 절벽 쪽을 바라보니 이미 샤프먼이 층계를 모두 내려와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샤프먼이 더욱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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