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별 - 18

by 달곰

“이대로 너를 보낼 수가 없구나. 야생의 교훈을 너에게 알려주겠다.”

샤프먼은 네 발이 모두 땅에 닿은 채로 몸을 살며시 웅크렸다. 그의 온몸에서 발산하는 근육의 긴장감이 여우에게 전해졌다. 언제든지 여우에게 뛰어올라 두 손으로 마구 내려칠 것만 같았다. 여우 역시 자세를 낮게 잡으며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 나를 보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자신이 한 말을 지키세요, 샤프먼.”

“나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 거짓된 망상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린 자신을 탓하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샤프먼이 네 발을 튕기듯이 날아올라 여우를 덮쳤다. 여우는 급히 몸을 뒤로 몰려 간발의 차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고 나서 급히 발을 놀려 뒤로 달아나 샤프먼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방금 전까지 여우가 머물렀던 땅 위에 샤프먼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어느덧 원숭이들은 모두 절벽 아래로 내려와 대치하고 있는 둘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형성했다.

“나를 순수히 보내줘요!”

“이미 늦었다, 여우여. 한 번 이를 드러냈으면 피를 봐야 끝을 볼 수 있다.”

샤프먼이 입을 벌려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그가 다시 뛰어올랐다. 여우는 빠르게 뒷걸음질 쳐서 가까스로 달려오는 원숭이를 피해 달아났다. 사방의 공간이 열려 있는 들판이었기에 여우는 샤프먼의 사나운 공세를 간신히 피해 갈 수 있었다. 숲을 향해 도망가고 싶었지만 이미 원숭이들에게 둘러 쌓여 나아갈 방향이 없었다.

‘숲에서 마주쳤다면 속절없이 당했겠다. 계속 도망 다닐 수만도 없고…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겠다.’

여우의 바람과는 달리 멀리서 지켜보던 원숭이들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여우와 샤프먼을 둘러싼 원의 장벽이 조여들었다. 여우로서는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어 불리했다. 원숭이들을 뚫고 나갈 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밀려오는 샤프먼의 육탄공세를 언제까지 막아설 수 있을지 여우는 체력적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거라고는 오는 길에 입에 넣은 산딸기가 전부였다.

샤프먼도 체력이 달려오는지 조금씩 공세가 약해졌다. 아니면 상대방의 체력을 소진하기 위해 힘을 아끼는 것인지 여우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여우의 몸통을 할퀴고자 파도를 밀어내듯 바닥을 쓸었다.

“반항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라 여우여!”

여우가 원숭이의 발톱을 피해 뛰어오르자 다시금 샤프먼이 소리쳤다. 도망만 다니던 여우가 이빨을 드러냈다.


“무슨 주제를 알고 법칙을 따르라는 것이냐!”

처음에 여우는 뒤로 뛰어올라 원숭이를 피해 갈 생각이었다. 순간적으로 샤프먼의 외침을 듣자 여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샤프먼의 발언에 기인하는 듯했지만, 그가 말하는 자연법칙에 대한 반감이었으며, 여우다운 삶에 대한 부정의 표현이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여우는 도망가기를 멈췄다. 뛰어오른 상태에서 그대로 샤프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여우의 주둥이가 샤프먼의 얼굴을 감싼 검붉은 털 안으로 파묻히듯 사라졌다 나타났다.

크아아아악

샤프먼이 황급히 얼굴을 감싸며 뒤로 몸을 물렸다. 원숭이를 올라탔던 여우의 네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여우가 고개를 드니 입에 살점이 한가득 물려 있었다. 주둥이 아래 하얀 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동시에 똑같은 피가 샤프먼의 얼굴을 흘렀다. 여우는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얼떨결에 원숭이를 기습 공격했다. 입안으로 맹수의 피가 흘러 들어왔다. 오랜만에 맛보는 피였다. 죽음을 넘나드는 싸움의 긴장감과 피를 입에 머금으니 느껴지는 생명의 생동감이 여우 안에서 교차했다. 여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우가 샤프먼을 물었다!”

“샤프먼이 피를 흘린다!”

주변의 원숭이들이 우두머리의 피를 보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샤프먼은 분노에 눈이 멀어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았다. 그의 눈에서 초점이 완전히 사라지며 야생의 본능만이 남았다.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겠다!”

온몸의 근육이 솟아오르듯 샤프먼은 날뛰었다. 광분한 짐승의 몸부림을 여우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독수리가 절벽에서 하강하듯 샤프먼의 육체가 여우 앞에 드리웠다. 상대의 폭발적인 움직임을 여우는 피할 수가 없었다.

‘아. 이렇게 삶이 끝나는구나.’

성난 원숭이의 두 주먹이 머리 위로 뻗어 해를 완전히 가렸다. 샤프먼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여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 앞으로 코끼리의 발자국이 떨어지듯 묵직한 사물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어 여우는 눈을 떴다. 여우의 눈앞에서 샤프먼의 얼굴이 땅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세차게 요동 쳤다. 그의 등 위로 이제는 검은 반점의 두 주먹이 샤프먼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검은 반점은 쉬지 않고 샤프먼을 내리쳤다.

크악 크아악

“작은 짐승을 상대로 피를 흘리는 샤프먼은 필요하지 않다! 나약한 우두머리는 사라져야 한다!”

여우에게 당한 일격으로 이미 샤프먼은 판단력을 상실하였다. 이어진 검은 반점의 거친 기습은 남아있는 그의 이성과 체면 모두를 앗아갔다. 샤프먼은 성급히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곧바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일반 원숭이 무리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겨 달아났다. 검은 반점과 그의 무리들은 남아 있는 샤프먼의 추종자들을 몰아세웠다. 이미 지배자를 잃은 추종자들은 이렇다 할 반격의 의지조차 보이지 못한 채 샤프먼을 따라 원숭이 무리 속으로 도망쳤다.


검은 반점은 승리의 위엄을 보이며 천천히 절벽 위로 올랐다. 그의 무리가 한 층씩 그의 뒤를 따랐다. 모든 원숭이들이 보는 아래에 지도자가 교체되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만약 잠시 자리를 비운 원숭이가 있었다면 우두머리가 바뀐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최상층에 다다른 검은 반점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지금부터 내가 샤프먼이다! 반대하는 원숭이는 지금 소리를 내라!”

절벽 아래로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피 흘리는 지배자는 이미 지배력을 잃었다. 원숭이 절벽 위에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다. 그렇게 검은 반점은 샤프먼이 되었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검은 반점, 아니 새로운 샤프먼은 의기양양했다. 흡족한 눈빛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내려보던 그에게 얼어붙은 듯이 서있는 여우가 보였다. 샤프먼은 자신의 아량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우여. 샤프먼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가? 답을 원한다면 다시 질문을 허락하마.”

순식간에 지도자의 자리가 바뀌었듯이 여우의 생과 사 또한 쉼 없이 교차했다. 육체 없이 영혼만이 남은 심정으로 여우는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여우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여우를 무시하던 이전 샤프먼의 목소리도, 원숭이 세계의 우두머리 교체도, 다시금 주어진 대담의 기회도, 여우에게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이 절벽에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샤프먼. 나는 새로운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내 길을 가게 허락만 해주세요.”

“… 좋다. 이미 원숭이들의 답은 들은 것과 같다. 떠나가라, 여우여.”

여우는 뒤를 돌아 처음 들어섰던 대나무 숲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번에는 원숭이의 뒤를 보초 원숭이가 따랐다. 숲의 경계에 다다르자 여우는 뒤를 돌아 절벽을 바라보았다. 최상층을 제외한 절벽 각 층의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원숭이들이 맨 아래에서 서성였다. 그 무리 안에서 이전 샤프먼의 모습을 찾고자 했으나 여우는 도저히 원숭이 무리 안에서 그를 구별할 수 없었다.

‘같은 이름아래 바뀌는 짐승의 존재란 땅 위에 피어 오른 아지랑이와도 같구나. 샤프먼이란 이름만 남고 원숭이들은 사라지겠구나.’

여우는 절벽을 등지고 숲으로 다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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