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학교에 스며들다.(2-4)
『마흔과 오십 사이(인생길을 바꾸는 논어 30수)』를 지은 최종엽은 『논어』의 양화(陽貨) 2장에 나오는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자왈 성상근야 습상원야)’를 인생의 한 문장으로 생각한다고 소개하였다. 이 글귀는 ‘사람의 본성이나 천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반복과 꾸준함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는 의미로,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게 태어나지만 무엇을 반복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점점 다른 길을 가게 된다는, 매우 평범한 말이지만 의미심장한 어구라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 글을 보고 나는 ‘반복’과 ‘꾸준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17년간 교사 생활을 하면서 보아온,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하지만 졸업할 때 보면 자신의 꿈을 이룬 아이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해 속상해하는 아이들도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반복과 꾸준함에 따라 자신의 꿈을 이룬 아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로 나눠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반복과 꾸준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논어』를 편찬한 공자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논어』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마도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부분이었던 것이리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나는 인천국제고에 근무할 때 아이들과 상담을 할 때 가끔 “요즘 가장 즐거운 것이 무엇이니?”라고 물어본다. 그러면 아이들은 한참을 고민하지만 별다른 답을 내놓지 못한다. 즐거운 것이 없으니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집에 가서 부모님과 먹는 치킨이라든지 선생님들 몰래 기숙사 뒤편에서 하는 데이트라든지, 면학 시간에 감독 선생님 몰래 하는 모바일 게임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떠올리겠지만 선생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니 이런 말을 대답할 수는 없어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질문을 한다. “공부를 하는 것이 즐겁진 않니?” 그러면 명확한 답이 나온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그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나?’하고. 아마도 아이들은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겠지. ‘공부가 즐겁다고?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니 공부를 즐겨라. 뭐 그런 뻔한 소리를 하는 것이겠지’라고 말하는 소리가 나한테도 들리는 듯하다.
물론 공부가 어찌 즐거울까? 나 역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교 4년과 대학원 2년까지 꽤 오랫동안 공부를 하면서 과연 즐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그런데 즐거웠던 적이 있었다.
임용고사를 앞두고 공부했던 대학교 4학년. 난 참 즐겁게 공부했다. 사범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대학교 4학년 때 임용고사를 보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이었고 나 역시 임용고사를 보기 위해 1년을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었다. 국어과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크게 ‘교육학’ 과목과 ‘국어교육학’, ‘문법’, ‘문학’의 과목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식들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서로 연결이 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고전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작품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선현들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지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서와 하나 다름없이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 희열을 느낄 만큼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문법을 공부하면서 흔히 쓰는 우리 국어가 수학 공식처럼 체계에 딱딱 들어맞는다는 점 역시도 너무나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일 아침 5시. 도서관 열람실 불을 켜고 들어가서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이런 즐거움 덕분에 1년간 큰 힘듦 없이 공부를 했고 대학교 4학년 때 임용고사도 한 번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나도 갑작스럽게 공부가 즐거워졌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임용고사 준비도 했지만 졸업을 위한 학점도 채워야 했기에 임용고사 준비에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부담 없는 과목을 선택하여 수강 신청을 했다.
그중에서 ‘현대시개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4학년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을 잘 알고 계셔서 4학년 학생들에게는 좋아하는 시 한 편을 정해 시를 해석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는 과제를 수행하면 최소한의 학점을 준다는 소문에 이 과목 수강 신청을 했다.
역시나 소문대로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수님께서는 4학년 학생들은 발표할 시를 선정하는 것도 자율적으로 하고, 발표도 3월에 먼저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애송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선택하고 그래도 4학년의 체면이 있으니 여러 논문과 개론서를 참고하여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3월 둘째 주, 첫 수업에 내가 가장 먼저 발표를 하게 되었고 나는 완벽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자신만만하게 발표했다. 문학 비평의 4가지 관점 중 ‘표현론’, ‘반영론’을 중심으로 김소월의 생애와 김소월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 그리고 이 시의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해설 등 김소월을 연구한 대가(大家)들의 논문을 인용하여 완벽하게 발표를 마쳤다. 발표를 들은 후배들 역시 4학년 선배답게 보고서도 완벽하고 여러 학자들의 내용을 고루 인용한 보고서에 대해 별다른 질문 없이 멋진 발표였다고 감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런데 발표를 듣고 계신 교수님의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갑자기 교수님께서 “그래서 이 보고서를 통해 자네가 말하고 싶은 것이 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저는 그러니깐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정한모 교수님의 논문에 나오듯…”
“아니, 정한모 교수의 생각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한 자네 생각말일세.”
“그러니깐 이 작품은 이별의 슬픔을,,어,,반어적 표현을 활용하여,,,어,,”
“자네, 사람을 역겨워 해 본 적 있나?,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네에게 헤어지자고 하면 말없이 고이 보내줄 수 있나?”
“아,,,아니오.”
“말없이 고이 보내줄 수 없으면서 어떻게 이 작품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자네 보고서는 자네가 쓴 보고서가 아니야!”
하시면서 버럭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후배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고 보고서를 대충 써내도 된다는 다른 친구들 말에 그래도 교수님에 대한 예의가 있고, 학점을 잘 받고 싶은 욕심에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서가 아니라고 혹평을 하시다니,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든, 윤동주의 서시든 어떤 작품이든 읽는 사람, 즉 독자의 관점에서 그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 작품을 작가는 어떤 의도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에서 썼는지 공감을 하고 나름대로의 느낌으로 해석을 해야 제대로 시를 읽은 것이라고 생각하네. 이 보고서를 보면 내가 쓴 논문을 인용한 내용도 많은데, 그건 내 생각이야. 그 생각에 백퍼센트 동의하나? 동의해서 쓴 건가? 동의하지 않는데 내가 쓴 논문이니깐 그냥 가져다 쓴 거야? 그건 공부가 아니지”
나는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의 충격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25살에 깨달은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공부하는 모든 내용을 나의 삶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마치 내가 김소월이 된 것처럼, 그랬더니 공부가 정말 미치도록 재밌어진 것이다.
흔히 학문의 즐거움은 시험과 성적 등의 외부적인 목표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위해 노력할 때 느껴지는 것이므로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고등학생 때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고등학교에 다닌 3년 동안에는 대학 입시에 시달리며 공부가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공부의 진정한 즐거움은 시험에 합격했을 때, 또는 경쟁자를 이겼을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알게 된 것으로 인해 조금 더 성숙해질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즐겁지 않니?”라고 질문하고 난 다음, 나의 대학교 4학년 때 생활을 담담히 풀어놓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즐겁던 그 시간들에 대해.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공부가 즐거우려면 앎과 삶이 일치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문제 하나를 더 맞히기 위함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민해 보라고 말을 한다.
나는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국어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난 국어 교사보다 사실 역사 교사가 더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복수전공하여 역사 교사 자격도 가지고 있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동안의 우리 역사를 보다 보면 크게는 나라의 흥망성쇠, 작게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적인 인물(거창한 위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한 개인의 삶이 나의 역사이기에)로서 내가 나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 시대를 살아간 역사적인 인물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예측해보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난 지금도 역사서를 꾸준히 읽고 『논어』를 꾸준히 읽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씩 풀어놓으면 물론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다가올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함이고, 시험이 끝나면 고개를 흔들어 다시 머리를 비우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앎과 삶이 일치하는 공부를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공부가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가 목적이 되는 공부를 해본다면 공부가 즐겁고 저절로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당신은 공부의 진정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친구를 이겨서 느낀 기쁨 말고. 공부하는 과정의 기쁨을 느낀 적이 있는가? 공부로 인한 결과의 기쁨 말고.
진정한 공부의 기쁨과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기쁨을 알게 된다면 분명 진정한 성공과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논어의 제일 첫머리에 “學而時習之 不亦說乎”가 놓인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