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지지 못한 화는 이야기가 되었다.

곰민정의 독립출판기 : 이야기 고르기

by 곰민정






"Only put off until tomorrow what you are willing to die having left undone."

내일로 미뤄라. 행하지 않고 내일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라면.


- Pablo Picasso






퇴사를 했다.


사랑하는 일이었다.

실내건축을 전공한 나는 졸업 후 오래 방황했다. 건축 말고도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았다. 콘텐츠, 기획, 소설, 그림, 어린이, 놀이터, 그림책, 카페 등등등. 하지만 뾰족한 방향을 찾지 못했으므로, 졸업과 함께 건축사 사무소에 들어갔다. 건축사 사무소의 생활패턴은 집순이인 내가 견디기에 힘이 들었다. 다음엔 친구가 창업한 도시 콘텐츠 회사에 들어갔는데, 너무 재미있고 신나는 대신 너무 돈이 안됐다. 어쩌나... 하던 차에 평소에 눈여겨보던 공간 기획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이 회사 뭐야.

'일상의 즐거움'을 위한 콘텐츠를 기반으로 어른을 위한 카페와 아이들을 위한 작업실을 만든단다. 혹시... 저를 위해 만들어진 회사인가요...? 다다르고 싶은 끝점이 같았으므로, 회사에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업무가 아니라 모험 같았다. 덕분에 회사에서 나는 설계, 현장 관리, 아카이브 북 만들기, 블로그 글쓰기, 심지어는 정원 관리까지. 때론 숨이 턱까지 찼지만, 신나게 해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랬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10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꿈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림책 작가가 될 거야. 그림책을 3권 내고, 서울에서 차로 1시간 30분 이내에 있는 빈집을 살 거야. 거기에 그림책 쇼룸 겸 편집숍 겸 카페를 낼 거야. 자리를 좀 잡으면 옆 집을 사서 식당을 만들 거야. 또 자리를 잡으면 에어비앤비 할 수 있는 집도 만들 거야. 도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만들어 줄 거야. 회사의 꿈은 분명 나의 꿈과 닮아있었지만, 분명 달랐다. 어느새 이야기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옅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안주하다 보면, 80살에 '할머니 옛날 꿈은 말이야...'라고 말하고 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그림책 학교에 왔다.



올해 3월부터 장장 7개월을 그렸다.

그 사이 깨달은 것들이 있다.


1. 매일 그리는 삶은 생각보다 고난이도다.

시간을 어떻게 쓸지, 영감을 받을지 - 영화를 볼지, 책을 읽을지, 전시를 볼지 -, 작업을 할지 - 어디에서, 어떤 도구로, 무엇을 그릴지,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알아서. 의외의 압박감이었다.


2. 그리는 삶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1년간 그림을 그리고 살 예산 계획을 다 해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리는 세계를 미처 알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종이의 세계, 물감의 세계, 캔버스, 잉크, 색연필, 과슈, 아이패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 엄청난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하이엔드는 끝이 없다. 그리고 자주 비싼 게 좋다.


3. 돈(재정상황)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그리는 생활에 돈이 많이 들다 보니, 생활비를 아껴 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돈 앞에 자꾸 작아지는 내 마음.


4. 그림으로 생계를 꾸린다는 건 조금 막막하고 긴 길이다.

친구들에게 그림책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면, 종종 그거 만들어서 밥 먹고 살 수 있는지 동그란 눈으로 묻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끊긴 월급과 앞으로의 돈 들어갈 일들을 계산해보면 내가 모르는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진다.


5. 이 모든 상황들은 사람을 조금 예민해지게 한다.

회사를 가지 않으면 마냥 너그러워지고 세상이 아름다워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주일이 채 가지 않았다. 점차 내 삶에 흘러들어오는 불안은, 평소 같으면 웃어넘길 일들에 생각이 깊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예민해졌다.







이대로 가라앉을 순 없다.


움직이기로 했다.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어떻게든 올릴 수 있는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운동을 시작했다. 복싱을 시작하기도 하고, 아침에 약수터까지 달려가 거꾸리를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조금씩 어깨가 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론 루즈한 일정을 타이트하게 조일 마감을 만들기로 했다. 핸드폰을 열어 보이는 전시, 페어, 마켓을 모두 신청했다. 뭐 하나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베어북 마켓에 나가게 되었다.

매일매일 작업을 이어가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내 작업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보는 것도 공부가 될 거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북마켓에 나가는데 북이 없다는 것 정도? 그치만 괜찮다. 원래 일은 마감이 하는 거니까. 마감을 만들어 뒀으니 뭐가 되든 될 거다.


올해 나의 마음을 위로한 책을 만들기로 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불쑥불쑥 화가 올라오던 내 마음을 위로해준 이야기였다. 화난 마음을 달래려고 파란색 물감으로 화산을 슥슥 그렸는데, 화산을 열개쯤 그리고 나니 어떤 목소리 하나가 살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를 따라 그림을 그리다 보니 짧은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글과 그림을 그리는데 다 합쳐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가 오래 내 마음을 다독여줬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내 마음에 쏙 드는 책의 형태로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잘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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