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비싸고 다리 아프지만 포기 못할 아름다운 세계

곰민정의 독립출판기 : 종이 고르기

by 곰민정



자신이 “좋네.”하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이 미즈마루씨 그림이 가진 ‘설득력’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안자이 미즈마루




나는 가끔 나의 덕질이 무섭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전 국민이 돼지 저금통과 "애기야, 가자"를 외치던 2004년을 다 보내고 다음 해였던 2005년 겨울. 나는 뒤늦게 <파리의 연인>에 빠지고 말았다. 애들이 학교에서 애기야 가자를 외칠 때에는, '뭐야, 왜 저래' 했었는데, 어라, 너무 재밌잖아! 드라마 전회차를 3~4번씩 돌려본 나는 엔딩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나는 내 마음에 드는 편집본을 만들기 위해 영상 프로그램을 연습한다. 더듬더듬 눌러보면서 독학으로 배웠던 그 프로그램은 이제 이름도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지금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접하면 비교적 쉽게 잘 배우는 편인데, 그건 모두 <파리의 연인> 덕분이다. 박신양 이후로 연예인에 빠진 적은 없지만 종종 나는 주변 사람들이 '으잉?' 하는 포인트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렇게 눈이 한 번 돌아가고 나면 돈이고 시간이고 훌렁훌렁 다 써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올해 한지에 빠졌다.


더 정확하게는 한지를 재현하는 것에 빠졌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저 시원하고 하늘하늘하고 영롱한 느낌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대체? 당연히 내가 한지에 그림을 그렸으니, 한지에 인쇄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인쇄의 세계에서 한지는 정말이지 까다로운 놈이었다. <산과 나> 이야기에 찰떡인, 내 마음에 쏙 드는 종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다.


• Step 1. 인 더 페이퍼 (을지로)


가장 처음 간 곳은 <두성종이>에서 운영하는 오프라인 종이 매장 인 더 페이퍼. 공간을 가득 채운 온갖 종이들을 보고 있자면, in the paper라는 이름 정말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상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마어마한 종이 더미에서 나만의 한 장을 찾아내야 한다. 미세하게 다 다른 흰 종이로만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이곳에서. 아직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긴 어렵지만, 종이마다 미묘하게 다른 매력이 있으므로, 일단 다 산다...


• Step 2. 페이퍼 모어 (충무로)

다음으로는 <삼원 제지>에서 운영하는 종이 매장 페이퍼 모어를 찾았다. 인 더 페이퍼에서 따릉이로 10-15분이면 도착하는 위치라, 같이 가보기 좋은 장소. 2층은 종이 상점, 1층은 테스트 출력이 가능하다. 인 더 페이퍼에 있다가 페이퍼 모어에 가면 종류가 확 줄어든 느낌이 있긴 하지만, 묘하게 겹치지 않는 라인업에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지 종류는 많지 않았는데, 그 나름대로 예뻐서 또 종이를 한가득 사버렸다... 우리 집이 인 더 페이퍼가 되겄구먼...


• Step 3. 한지문화산업센터 (북촌)


건축 일을 하던 시절, 대학교 때 무지 좋아했던 임태희 교수님 사무실(limtaehee_design_studio)에서 한지산업문화센터 설계를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호닥딱 달려갔었다. 그땐 공간과 가구를 보며 감동을 받고, 추억으로 리플릿을 한 권 받아왔었는데, 이제는 공간보다 리플릿을 만든 한지가 눈에 들어온다.



와... 부들부들 질감이 너무 좋은데... 이거 무슨 종이지...!!! 다급한 마음에 입구 지킴이분께 다짜고짜 종이의 출처를 묻는다. 앞에서 반짝반짝 눈빛을 쏘아대고 있으니, 친절한 지킴이님이 팀장님께 확인해주신 이 종이는 '고감 한지'의 제품이란다. 얼른 집에 가서 찾아봐야지.



기존 제지 회사에서는 샘플북이 나온다. 샘플북 안에는 한 종이의 두께, 색상, 패턴이 다른 종이들이 조르륵 담겨 있고, 종이를 골라야 할 때마다 큰 종이를 펼치는 대신 간편하게 이 샘플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지는 늘 샘플북이 없다. 제지회사처럼 큰 규모가 아니다 보니 샘플북을 자체 제작하기 쉽지 않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늘 그게 아쉽다. 그런데 바로 그 한지 샘플북을 한지문화산업센터에서 만들어뒀다. 아, 이런 게 센터의 역할이지, 잔잔한 감동이 인다. (단, 구매는 불가능)


Step 4. 전북 한지 (인사동)


한지산업문화센터(맨날 산업문화센터인지, 문화산업센터인지 헷갈린다@_@!!)에서 얻은 인사동 인근 한지/필방 지도를 가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인사동 골목을 따라 구석구석 규모도 스타일도 다른 가게들이 가득하다. 어떤 가게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많아 주인장이 제품 위치를 알려주느라 바쁘고, 어떤 가게는 세월만큼 수염이 긴 할아버지가 한지의 역사를 설명해주신다. (너무 좋은데, 왠지 설명해주신 한지를 다 사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좀 있다...) 인사동 꽤 자주 왔었는데, 한지의 관점(?)으로 여행하는 인사동은 또 새롭다.



내 기준 가장 한지 쇼핑하기 좋았던 곳. 한지뿐만 아니라 붓이나 분채 물감 등 동양화에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모아 판매하시고 있었는데, 둘러봤던 한지 가게들 중에서 가장 화방스럽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둘러보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할 일을 하고 계시다가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는 방식이 가장 편안했다. 책을 만든 이후에도 종종 들를 것 같다.


Step 5. 고감 한지 (전주)


한지문화산업센터에서 전수받은(?) 고감 한지 리서치에 들어간다. 역시, 한지의 고장 전주에 있는 곳이었다. 아. 전주 갔을 때 가봤으면 참 좋았을걸. 그래도 내가 원하는 종이를 이렇게까지 파고들어 보다니. 괜히 뿌듯하다. 싱글벙글 신난 마음도 잠시, 내가 선택한 그 한지는 전지 사이즈 250장 단위(한지의 사이즈는 두 가지가 있다. 4.6판 전지 788*1090 / 대발한지(장지) 750*1440. 짱 크다.)로 판매한단다. 이번에 수작업으로 40권을 만들 예정인데, 40권 제작하는데 전지 20장이 든다. 그럼 남은 230장은... 이불로 쓰거나... 하... 원룸 자취생에게는 힘든 선택지다... (이 이야기는 페어가 끝난 지금도 아직 ing다. I'll be back!)


Step 6. 다시, 인 더 페이퍼 (을지로)


마음을 다잡고 인 더 페이퍼에서 조금 더 현실적인 선택지를 찾아본다. 종이 사이를 몇 시간 동안 헤맨 끝에 찾은 종이는 두 가지. '씨에라' 그리고 '펩틱트링가'. 씨에라는 52g(낭창낭창 제일 얇은 A4 두께가 70g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아주 얇다)의 아주 얇은 두께가 있다 보니, 한지의 얇고 투명한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팹틱트링가는 손에 닿는 느낌이 종이보다는 옷감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부드러운 한지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종이를 정했다.

어쩌면 아무도 모를지 모르는 종이 때문에 한 여름의 종로 을지로를 무지막지하게 돌아댕겼다.

누가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을 때도 있지만. 새로운 종이 마음에 드는 질감을 만나면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가는 게,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 히히.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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