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민정의 독립출판기 : 한지 느낌 재현하기
- 아크 백남원 선생님
올해 나의 키워드를 고르라면 #파랑 그리고 #한지 다.
올해는 하루에 최소 10장, 가급적 9 to 6를 지켜가며 작업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최대한 지켜보려고 버둥버둥했더랬다. 어떤 날은 신나게 20장을 그려댔고, 어떤 날은 연필조차 들지 못했다. 그래도 매일매일 그리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다작이 답인가 보다.
#파랑
흰 종이가 지겨워질 무렵, 나는 글벗서점에 가서 오래된 책 한 권을 샀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 있던 재료들 - 연필, 파스텔, 수채화 등 -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통 보이지가 않았다. 그 무렵 새로 만난 재료가 바로 과슈였는데, 불투명 수채화 재료라 책 위에 그림을 그려도 매트하게 쨍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 슥슥 계속 그렸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파란 그림만 그리고 있더라나? 사실 그림을 그리면, 누구보다 그리는 내가 그 그림을 오래 본다. 파랑 그림을 그리면서 보고 있자면 마음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이었다. 아. 컬러테라피라는게 이런 걸까. 사이다 마신 것처럼 속이 시원하네. 그렇게 나는 한동안 파랑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한지
사실 처음엔 경제적인 이유였다. 종이는 생각보다 비쌌다.
그래서 좀 가볍게 연습할 만한 종이가 없나, 고민하다가 화방 2층 한 켠에 마련된 한지 코너에 가보게 되었다. 전지 사이즈의 커다란 한지를 사서 집에 오니, 여기에 어떻게 그림을 그리나. 재단을 하려니 귀찮아져서 자를 대고 슥슥 잘랐다. 가장자리의 트실트실한 느낌이 의외로 괜찮았다. 커다란 종이를 내가 원하는 사이즈로 슥슥 잘라 쓸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웬걸, 그 위에 그림을 그려보니, 묵직한 종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하늘하늘 비치는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일반 종이가 운동화라면, 한지는 쪼리를 신고 팔랑팔랑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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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지를 어떻게 책으로 만든담?
한지에는 인쇄가 안된단다.
종이에는 무조건 인쇄가 되는 줄 알았는데. 인쇄소에서 취급해줄 수 있는 종이는 70g ~ 350g 정도의 인쇄용지. 한지는 결이 살아있는 특성상, 재질이 균일하고 일정하지 않아서 인쇄소 기계가 고장 날 수 있으므로,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허허... 이거 어쩌면 좋은가. 팔랑한 한지의 느낌이 내가 지은 이 이야기랑 찰떡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짜지...
에라 모르겠다, 여행이나 가자.
머리를 식혀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주에 여행을 갔다. 왜 전주에 갔는가. 하면 사실 이것도 경제적인 이유. 여행은 가고 싶은데, 예산은 빠듯하고, 에어비앤비 숙소들은 비싸고 좋거나 싸고 별로였다. 엄청난 리서치 끝에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근사한 곳을 찾았다. 그 숙소가 전주에 있었다. 그래서 나의 여행지는 전주가 되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운명이었을지도...
한 여름의 전주는 무척 더웠다.
딱히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한옥을 좋아하는 나는 전주 한가운데에 있는 경기전에 갔다. 그런데 아이고, 생각보다 한낮의 햇살은 너무 따가웠고, 그 햇살을 피하려고 나는 경기전 안쪽에 있는 <어진박물관>에 들어갔다. 에어컨 빵빵한 어진박물관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던 찰나, 한쪽 벽에서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이거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던 기법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다 무릎을 탁 쳤다. 배채. 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초상화 뒷면에 채색하는 과정. 한지는 얇고 물감이 잘 스며들기 때문에, 앞면의 그림이 뒷면에, 뒷면의 그림이 앞면에 배여 나온다. 그래서 한지에 그린 그림은 앞 뒷면이 모두 인쇄되었을 때 온전한 한 장의 그림이 되는 거 아닐까! (민정 뇌피셜)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앞 뒷면을 테스트로 인쇄해봤다.
허허.
유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