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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돋.명 ⑤ 이채언루트 [Madeline]

가장 이채로운 듀엣

by 고멘트

숨.돋.명은 ‘숨겨져 있던 소름 돋는 명반’의 약자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명반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앨범들을 선정해 심층 리뷰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이채

90.jpg 출처 멜론매거진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강이채는 한국 재즈 씬에서 고유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플레이어다. 2015년 선우정아, 바버렛츠, 비브라포니스트 마더바이브와 ‘대한포도주장미연합회’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2017년부터는 ‘디어 재즈 오케스트라’를 직접 만들어 지휘자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비단 재즈 활동뿐 아니라 2015년 MAMA에서 소녀시대 태연과 함께 콜라보 무대를 만들기도 했었고, 아이유, 김필, 까데호, 고상지, 윤석철 등 장르를 막론하고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한 연주자로도 유명할 것이다.


반면 높은 개인 인지도에 비해 곡의 인지도까지 같이 따라오는 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음원을 짧은 주기로 내는 편도 아닐뿐더러 그녀의 솔로 곡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가까운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으로 낸 첫 정규 앨범 [Radical Paradise]부터 그런 기운을 감지할 수 있으며, 2017년의 싱글 ‘Sorry for Us’나 2018년 EP [Hitch]에서는 어느 정도 팝적인 감각이 섞여 있었다지만 디어 재즈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발매한 음원들과 특히 올해 5월에 발매된 [The Granter] 같은 경우에는 철저한 재즈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음악들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유명하긴 하지만 막상 노래는 잘 모르겠는’ 가수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영상 1:15부터.

(과연 그것이 필요한가는 둘째 치고) 불안할 수도 있었을 ‘인디 아티스트’ 강이채의 입지를 비교적 탄탄하게 지탱해 주는 곡이 있다면 아마 ‘Uneasy Romance’ 일 것이다. 2인 밴드 이채언루트 (Echae en Route) 시절 발매한 EP [Madeline]에 수록된 이 곡은 2016년 tvn 드라마 <또 오해영> 명장면에 삽입돼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린 곡이다. 그때 처음 이 곡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찾아보면 ‘무조건 외국 노래인 줄 알았다’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 노래의 가삿말이 영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 노래에는, 그리고 이 앨범에는 무언가 말로 하기 어려운 ‘한국스럽지 않은’ 지점이 있다. 그 부분이 이 앨범이 뛰어난 앨범이게끔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번 “숨돋명”의 대상은 바로 그 앨범. [Madeline]이다.



집시 재즈


각종 인터뷰와 SNS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원래 재즈가 아닌 클래식을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중가요에서도 바이올린을 비롯한 스트링 오케스트라 세션이 자주 쓰이긴 하지만, 그 연주는 어디까지나 세션의 범위에서 클래식 용법으로 쓰이는 것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고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들으면 “이상한 리듬을 타게 될까 봐” 혼이 나면서까지 매일매일 클래식 바이올린을 연주해 왔다. 그러던 와중에 접한 아티스트가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레펠리 (Stéphane Grappelli)다.


통통 튀는 리듬의 집시 재즈 씬에서 활동하던 거장의 연주는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기 충분했으리라. 그렇게 그녀는 클래식에서 재즈로 장르를 바꾼 후 버클리 음악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버클리에서의 생활도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미국에서는 외롭고 일도 힘들고 사람도 잘 맞지 않았다. 졸업 후에 떠난 미국 집시 밴드 투어는 행복하긴 했지만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 늘 굶주려야 했다. 결국 6년 반의 미국 생활을 뒤로하고 2014년 그녀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자칫 음악과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굳이 장황하게 푼 것은 이 이야기에서 알아둬야 할 포인트가 두 가지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녀는 클래식과 재즈 모두에 능하다는 것. 또 두 번째는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했고, 미국에서도 집시 투어를 돌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훗날 펼쳐낼 그녀의 음악들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된다.



밴드 ‘이채언루트’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 팀을 만들고자 마음먹었고, 그 과정에서 만난 베이시스트가 바로 솔루션스의 권오경이다. 원래 드럼 멤버까지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강이채와 권오경은 새로운 드럼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드럼이 빠진 빈 공간을 채우고자” 했다. 바이올린과 베이스로만 밴드를 구성한 것이다. 곧바로 이름도 정해지니 멜로디를 담당하는 강이채 (Echae)와 밴드의 뿌리 (Route)가 되어주는 베이스가 있으니 뿌리 위에 있는 이채. 즉 Echae en Route가 바로 그 이름이다. 그 후 그들은 이전 강이채가 썼던 곡들을 기반으로 작업에 착수해 [Madeline] 앨범을 발매한다.



Get Into

앨범의 포문을 여는 역할이자 유일하게 권오경이 작곡한 트랙 ‘Get Into’는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일 것이다. 독특한 입소리의 루핑을 시작으로 들어오는 인트로와 벌스는 철저하게 보컬 샘플로만 사운드가 구성된다. 그 뒤로 본 멤버들의 베이스와 바이올린 연주가 얹어지지만 그 어떤 것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베이시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의 앨범이지만 절대로 무게감이 그 악기들로 치우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련된 탑라인과 루프 스테이션 운용 등 다양한 요소로 본인들의 음악을 어필하는 듯하다.


바이올린이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딱 한 순간. 간주파트뿐이다. 이 파트에서 바이올린 연주는 마치 락 장르의 기타 솔로와도 같다는 인상이다. 음원 기준 1:58초. 그러니까 간주 9마디 째의 바이올린 라인은 누가 들어도 락 발라드나 하드락의 기타 솔로 라인이 아닌가. 이마저도 온스테이지 라이브에서는 그 주인공의 자리를 바이올린이 아닌 랩퍼 넉살에게 양보한다. 당시 인디 곡에서 쉽게 듣기 어려웠던 색다른 유형의 곡이었으면서도 동시에 앨범의 기대감을 증폭시킬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곡이었다.



A Song Between Us와 Uneasy Romance

강이채가 한국에 돌아와 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선우정아이다. 유튜브 프로그램 ‘LIVE AND DIRECT’에서 콜라보를 하며 만나게 된 [1] 그녀는 강이채에게 노래도 직접 해보라고 권했다. 이전에 노래는 해본 적이 없던 강이채였지만 선우정아는 분명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결국에는 특유의 음색을 기반으로 보컬 플레이어로서도 고유한 매력을 갖추게 됐기에 그녀의 조언은 매우 유효했던 셈이다.


그때 선우정아가 직접 제목까지 주어 준 이 노래. ‘A Song Between Us’는 이전 곡 ‘Get Into’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이다. 전체적으로 아이리쉬 팝스러운 분위기를 가지며 철저하게 바이올린과 베이스, 그리고 보컬로만 곡이 구성된다. 우쿨렐레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당신이 들은 그 소리는 우쿨렐레가 아닌 바이올린의 소리이다. 바이올린을 피치카토, 스트로크 등의 주법으로 연주함으로써 개성을 확보하고, 피아노와 기타의 부재를 해결한 것이다. 듣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들리면서도 새로움을 챙긴 곡이다.


이러한 아이리쉬적인 분위기는 다음 트랙에도 계속 이어진다. 앞서 말했듯 드라마 OST로 삽입돼 소소한 인기를 얻은 곡 ‘Uneasy Romance’는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주법, 감성적인 탑라인으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1절에서는 EP처럼 튜닝된 베이스를 통해 앰비언트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며 길게 빌드 업 하다가 벌스 2에서 들어오는 바이올린 연주는 참으로 극적이다. ‘A Song Between Us’에서는 바이올린이 새로운 인상을 심어줬다면, 본 곡에서는 베이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절대로 베이시스트 권오경이 단순한 백업 세션의 위치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권오경이 있었기에 이채언루트가 완성될 수 있었다.



달데이트 그리고 Madeline


앨범의 절반을 지나 분기점이 될 4번 트랙부터는 아이리쉬적인 분위기보다는 집시적인 느낌이 강하다. 가장 팝의 색깔이 강한 타이틀 ‘달데이트’는 바이올린 피치카토로 시작된다는 점에선 ‘A Song Between Us’와 유사하지만 훨씬 더 밝고 통통 튀며 EP와 실로폰 같은 건반 소리가 이를 지원해 준다. 간주를 바이올린 솔로로 채우던 여느 곡들과 달리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기타 솔로가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집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레펠리의 팬이었고, 그 시기 프렌치 집시 재즈 밴드 ‘Dusky 80’의 객원 세션도 겸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장르적 분위기가 강하게 스며든 곡이다.


영상 0:44부터. 라이브 특성상 베이스가 함께 한 버전

환상적인 테크닉이 돋보이는 연주곡 ‘Run’을 지나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Madeline’은 바이올린과 보컬만 등장하기에 미국 그리고 유럽을 떠돌며 홀로 버스킹 하던 모습이 그려진다. 첫 곡 Get Into가 가장 권오경스러운 곡이라면, 이 곡은 가장 강이채스러운 곡일 것이다.



새로움으로 가득 찬 앨범


이 앨범은 다른 팝 앨범에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역시 가장 먼저 느껴지는 특이점으로는 바이올린과 베이스의 조화일 것이다. ‘Get Into’와 ‘Run’에서의 드럼, ‘Uneasy Romance’의 퍼커션 [2], ‘달데이트’의 밴드 세션을 제외하면 본 앨범의 모든 악기는 바이올린과 베이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만 다른 악기의 부재에서 오는 어색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바이올린과 베이스의 매력을 더욱더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바이올린은 솔로에서부터 피치카토, 스트로크 등 다양한 주법으로 곡의 진행을 이끌어가고 베이스는 이를 훌륭하게 보좌하며 그 어떤 음악들보다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온스테이지에서도 언급했지만, 밴드 음악에서 바이올린이 쓰인 사례는 몇 있었지만 이전까지는 철저하게 월드뮤직, 포크, 혹은 프로그레시브 락이나 포스트 락의 영역에서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포크나 락이 아닌 팝의 문법에서 기타나 건반 없이 완벽하게 대체해 낸 음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앞서 말했듯이 드럼이 빠진 빈 공간을 채우고자 연구하며 “바이올린과 베이스가 가진 한계를 풀어나가기 위한” 그들의 고민이 녹아든 결과이다.


두 번째는 장르적 문법이다. ‘Get Into’의 실험성, ‘A Song Between Us’와 ‘Uneasy Romance’에서의 아이리쉬함, 달데이트의 집시스러움 등 곡마다 품고 있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제껏 아이리쉬나 집시류의 월드 뮤직은 한국에서 더더욱 듣기 힘든 장르였다. 특히나 아일랜드 음악은 하림과 밴드 두번째 달 등이 소소하게나마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면 집시 음악은 기타리스트 박주원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이을 명맥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이 월드뮤직적 요소들을 팝의 영역에서 훌륭하게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 악기를 비롯한 디테일한 요소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것이 아닌 '~~스러운 팝'의 범위에 철저하게 머물렀고, 그것을 통해 앨범 단위의 통일성까지 챙긴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역시 미국에서 집시 밴드 생활을 하고 그 후에도 유럽 각지를 떠돈 강이채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처음 언급한 ‘한국스럽지 않은’ 지점일 것이다. 단순히 가사가 영어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장 이채로운 듀엣

출처 스트리트H

그렇게 특별함으로 무장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음악이 어색하다거나 어렵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 강이채의 세련된 탑라인 메이킹과 음악적 역량이 뒷받침됐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이 앨범뿐 아니라, 후에 펼쳐 나갈 음악들 ~솔로 앨범. 디어 재즈 오케스트라 앨범, 편곡 참여~을 들어보면 그녀는 팝, 재즈, 오케스트라, 월드뮤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두 깊은 이해도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 있지만 강이채는 분명 한국 재즈 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플레이어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작점이 본 앨범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앨범이 가진 의의는 더더욱 클 것이다. 2015년 강이채는, 그리고 밴드 이채언루트는 이미 준비된 신인이었고, 가장 이채로운 듀엣이었다.




[1]

선우정아와의 인연을 맺게 해 준 이 LIVE AND DIRECT 촬영본에서는 보컬과 기타 연주 모두 선우정아의 몫이었다. 그 외에도 브릿지나 아웃트로의 존재 유무 등 송폼적인 면에서도 조금 차이점이 있지만 두 버전 매우 매력적이니 팬이라면 충분히 들어볼 만하다.


[2]

심지어 이 곡에서 퍼커션의 역할은 극히 한정적이다.



기사 출처


"프로듀싱·피처링·오케스트라 지휘… 개미처럼 일한 아티스트로 남고 싶어" (chosun.com)

[이채언루트] 두 악기가 들려주는 이채로운 음악 하나 – Music webzine M

Pick! New Indie Musician – 008. 이채언루트 | 스트리트 H (street-h.com)

모범생의 길에서 살짝 벗어난, 싱어송라이터 강이채 | 연합뉴스 (yna.co.kr)





By 베실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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