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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멘트 Jun 11. 2024

국내 슈게이즈씬의 부흥을 맞이하며

노이즈의 미학, 슈게이즈의 세계로

잔뜩 노이즈 낀 기타 소리와 그에 묻혀 들릴 듯 말 듯한 웅얼거리는 보컬, 흡사 소음과도 유사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음악이 있다. 바로 슈게이즈이다. 슈게이즈(shoegaze)는 '신발(shoe)'과 '응시하다(gaze)'의 합성어로 공연 내내 자신의 신발만 바라보며 연주하는 모습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얼핏 들으면 관객의 시선이 두려워 땅만 바라보는 것 같지만, 실은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동안 이펙터나 앰프 출력을 활용하여 강렬하면서도 다채로운 노이즈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즉, 때에 맞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온 신경이 무대 바닥의 장비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여느 록 음악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던 탓에 과거 짧은 유행을 끝으로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이름처럼 사운드조차 직관적인 이 음악은 대중들이 일상에서 즐기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고, 실제 공연에서도 소통은 물론이고 노래를 따라 부를 수도 없는 데다 분위기에 취해 뛰어놀 수도 없는 판국이었다. 어느 하나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았기에 쉽게 입문할 길은 없었다. 


그런데 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슈게이즈가 몇 년 전부터 Z세대를 저격하며 록 마니아들의 대표 사운드로 자리 잡았다. 스포티파이에 따르면 2022년 11월부터 2023년까지 슈게이즈 스트리밍은 전년 대비 50% 증가했고, 슈게이즈 재생 목록인 'Shoegaze Now'는 800%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shoegaze' 일일 검색량도 220% 이상 증가했다. 더 놀라운 점은 플랫폼 전체 사용자의 4분의 1에 불과한 Z세대 청취자가 스포티파이 내 슈게이즈 아티스트 청취자의 60% 이상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특히, 해외에서는 틱톡을 중심으로 슈게이즈의 영향이 커지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Wisp의 'Your Face'가 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Wisp가 가벼운 마음으로 업로드했던 ‘Your Face’는 하룻밤 사이 10만 조회수를 찍더니 다음 영상은 60만 회, 그다음 영상은 100만 회를 기록했고, ‘Your Face’는 스포티파이에서 3천만 번 이상 스트리밍된 곡이 되었다. 이는 슈게이즈 대표 밴드인 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의 마지막 트랙 ‘Soon’에 약 2배에 달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해당 곡은 비교적 보컬이 잘 들리는 편이긴 하나, 여전히 공간을 가득 메운 노이즈는 슈게이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낯선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sp는 온라인에 스며있던 슈게이즈의 인기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재작년에 역주행한 Duster의 'Inside Out' 역시 슈게이즈와 드림팝의 자장 안에서 느린 템포로 침울하게 진행된 곡이었지만, 슈게이즈가 부상하던 시기와 잘 맞아 들어 틱톡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 


파란노을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BrokenTeeth [편지] / 왑띠 [우리의 친구 머피처럼]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해외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슈게이즈를 향한 Z세대의 관심으로 많은 아티스트가 발굴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파란노을이 있다. 2021년 발매한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Rate Your Music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음과 동시에 스테레오검, 피치포크에서 높은 평점을 받으며 단번에 주목받았고, 이제는 한국 인디씬에서 고평가받는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비슷한 음악을 하는 BrokenTeeth, 왑띠, Fin Fior, Della Zyr, Asian Glow와 함께 'Digital Dawn'이라는 합동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해당 공연은 몇 초 만에 300석 매진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더 나아가 새로운 세대의 인디 아티스트들을 위한 현장 쇼케이스로 의도되며 공연 그 이상의 의미를 보였다.


그렇다면 활발한 활동이나 홍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이들을 찾는 발걸음이 많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답은 그들의 음악이 자극하는 감성에 있다. 과거 My Bloody Valentine 시절에만 해도 슈게이즈는 현대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품이 들어간 장르였다. 그러나 현대 슈게이즈는 여느 장르와 다름없이 방구석에서 장비 하나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음악이 되었다. 즉, 날카롭고 넓은 공간감이 아닌 로파이한 사운드와 노이즈로 격정적이지만 부서질 것 같은 감성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양지의 차트로 올라온 적 없는 슈게이즈가 틱톡 세대를 겨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 슈게이즈 음악은 내재된 고유의 것을 자극하는 대체불가능한 감성이 있다. 먼저, 파란노을의 음악은 소위 말하는 '루저감성'을 버무린 직설적인 가사와 컨셉이 주는 이모 감성으로 대표된다. 특히, "찐따 무직 백수 모쏠 아싸 병신 새끼”, "언젠가는 잘될꺼야 언젠가는 빛날꺼야 나의 비참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과 같이 억눌려 있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가사들은 '중2병스러움'이라는 감상을 낳기도 했다. 거기에 투박하기 짝이 없는 보컬과 이를 무참히 묻어버리는 과격한 노이즈는 코로나 시절 방구석 유저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BrokenTeeth를 살펴보자면 그는 파란노을의 순한 맛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선명히 들리는 미성의 보컬, 그리고 시적인 표현과 불친절한 노이즈의 이질감이 만들어낸 조화까지. 여전히 강렬한 노이즈는 크게 일렁이지만, 곳곳에 묻어있는 섬세하고 친절한 감성은 순식간에 귀를 타고 넘어와 버린다. 마지막으로 왑띠의 경우 살짝 다른 인상을 주는데, 파란노을이 감성 그 자체에서 이모를 보였다면, 왑띠의 이모는 음악 그 자체에서 드러난다. 그의 음악은 인디 록의 접근 방식에서 이모를 더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팝적인 느낌을 주다가도 슈게이즈와 비슷한 보컬 믹싱, 루저감성, 특유의 탑 라인, 노이즈 등 여러 부가적인 요소로 슈게이즈 특유의 감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묘하게 다른 각자만의 감성이 젊은 세대를 저격하며 조금씩 입지를 넓혔고, 여기에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대중들의 유입이 이루어지며 씬의 확장에 힘을 가했다. 



현재 대중을 슈게이즈로 끌어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단연 혁오와 실리카겔이다. 그들의 음악으로 인해 대중의 귀는 실험적인 사운드를 조금씩 받아들이며 슈게이즈의 낯섦을 완화했을 것이다. 혁오는 <무한도전> 출연 이후 인디씬에 국한되었던 인기의 저변을 일반 대중으로 확대하며 많은 리스너를 확보했다. 이후 발매한 정규 2집 [사랑으로]의 마지막 트랙 'New Born'에서 오혁의 보컬 대신 기타 사운드로 가득 채운 슈게이즈를 선보였는데, 당시에는 낯설기만 한 음악에 호불호가 갈리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상승한 인지도 덕분에 많은 사람이 슈게이즈를 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분야 최고인 실리카겔. 아마 현시점에서 실험적인 사운드를 대중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아티스트는 실리카겔일 것이다. 실리카겔의 음악은 간단히 '네오 사이키델리아'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슈게이즈와는 엄연히 차이가 있지만 난해하고 생소한 인상을 준다는 건 동일하다. 때문에 그들의 음악을 소비하는 사람이 급증하는 요즘, 우리들의 귀는 슈게이즈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계속해서 하는 셈이다.


더불어 앞세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해경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2017년 발매된 [나의 가역반응]은 초판 품절 및 게릴라 공연 매진,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등 많은 인디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앨범이었다. 당시 음원 사이트 상위권이나 음악 방송 등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인디씬 내에서 화제를 모은 건 확실하다. 어쩌면 그는 슈게이즈 류의 사운드를 대중에게 처음 전파한 인디 아티스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행보는 청하, 러블리즈 Kei와의 콜라보를 만들었고, 또다시 현시대 아이돌 팬덤이자 대중에게 슈게이즈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정리하면 우리는 신해경을 통해 먼저 슈게이즈를 맛보았고, 이후 탄생한 인디 아티스트들의 음악으로 본격적으로 귀가 트이며 슈게이즈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짧고 굵게 족적을 남겼던 슈게이즈가 다시 떠오르고 있는 지금, 과연 이 음악은 계속해서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을까? 파란노을을 비롯한 국내 슈게이즈 아티스트들의 입지는 넓어지고 있고, 그들을 향한 Z세대의 관심이 날로 커지는 건 분명하다. 다만, 아직은 국내에서 록 음악 자체에 대한 수요는 매우 적은 편이라는 것. 거기다 우리나라는 떼창 문화가 있을 정도로 즐기는 공연에 진심이지 않았던가. 관객과의 소통 및 보컬의 부재, 장르에 대한 적은 수요는 해당씬의 파이를 넓히는 데 한계를 부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Wisp의 경우 직접 곡을 쓰지 않는다는 논란도 있기에 이러한 사례가 지속된다면 해외에서도 씬의 발전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슈게이즈씬에서 뛰어난 아티스트가 탄생하여 게임 체인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평범한 대학생이이었던 Wisp가 유명 아티스트가 되고, 커뮤니티 출신에 불과한 파란노을, BrokenTeeth, 왑띠가 인디씬에서 주목받는 아티스트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루저감성’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모 힙합이나 이모 락을 통해 표현되었으나, 이제는 로파이한 노이즈, 슈게이즈와 결합하여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비록 지금은 씬에 한정된 인기에 불과하지만, 혹시 아는가. 언젠가 익명의 누군가가 방구석에서 쏘아 올린 공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지. 




by.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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