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씬에 남겨진 과제
지난 5월을 뜨겁게 달궜던 래퍼 손심바의 커뮤니티 다중 계정 활동 사건. 일명 ‘110.12’ 사건은 손심바의 인정 및 데자부, 서리 크루 탈퇴 이후 어느 정도 일단락 돼 가는 모양새이다. 가볍게 설명하자면 손심바가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커뮤니티에서 유동 ip와 익명의 다중 계정을 이용해 지난 몇 년간 다른 래퍼들을 욕 해오다가 발각된 사건인데, 이와 같은 논란들이 사실로 밝혀지자 다른 래퍼들이나 관계자들 역시 손심바를 비판하고 있으며 특히 각종 힙합 커뮤니티에서 손심바의 옹호 의견은 거의 찾기가 힘들 정도이기에 그의 래퍼 커리어는 사실상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에 이른 듯하다.
쿤디판다, 디젤, 딥플로우 등으로 구성된 크루 서리(30)와 비와이, 씨잼 등이 소속된 레이블 데자부 그룹 (Dejavu) 역시 해당 논란을 피해 갈 수 없겠다. 단순히 ‘동료인 손심바가 그러고 있는 동안 너희가 진짜 몰랐겠느냐’ 하는 구시대적인 연대 책임론을 들이밀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리 크루와 같은 경우에는 ‘공격 태세’라는 컨셉 아래 각종 커뮤니티 밈을 활용하며 기존 힙합 씬과 래퍼들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디스 해왔기에, 이 사건 이후에도 그들이 이전과 같이 다른 래퍼들을 언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나아가 설상가상으로 서리 크루 음악의 대부분을 책임져온 비앙마저 탈퇴한 지금, 예전과 같이 ‘공격 태세’를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노선을 바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되기도 하겠다.
필자 역시 손심바의 이러한 과거 행각에 그 어떠한 옹호를 할 마음도 없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단순히 ‘손심바가 (사실상) 은퇴했으니 이걸로 사건 종결!’ 하고 넘어갈 수만은 없기에, ‘110.12 사건’을 보고 느낀 소회와 단상, 또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 나아가 해당 사건이 한국 힙합 씬에 남긴 과제 등을 짚어보고자 한다.
분명 커뮤니티에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것은 지난 5월의 일이지만, 해당 이슈 자체가 처음 제기된 시기는 한참 전인 2020년의 일이다. 아티스트 본인의 인지도도 낮았고 커뮤니티 내부에서만 이슈가 된 수준이었기에 크게 불이 번지지 않을 수 있었던 4년 전과 다르게 올해 다시 언급이 되며 사건이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손심바가 ‘랩 레슨’이라는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이센스와 트러블이 생긴 것이 그 원인이다. 비프가 일어나자 이센스의 팬덤은 즉시 손심바의 과거 행적들을 추가로 파헤치며 논란을 재점화시켰고, 이를 알게 된 이센스가 ‘110.12’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게 되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손심바에게 “시비 적당히 걸고 다니지” 같은 결과론적 비판을 넘어, 지난 4년간 손심바에게는 부끄러운 과거가 모두 드러나기 전에 빠르게 인정하며 사건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는 뜻을 의미한다.
2007년 버벌진트는 본인에게 제기된 ‘IP 조작 사건’을 비롯한 여러 이슈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본인의 복잡한 소회를 담은 앨범을 발매한 적이 있으니 그것이 한국 힙합 불후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누명] 앨범이다. 그는 이 앨범을 기점으로 기존의 논란들을 (음악으로) 종식시키며 레전드의 자리를 공고히 하게 되는데, 이전부터 친구 테이크 원과 함께 꾸준하게 여러 방면에서 버벌진트를 리스펙트 해온 손심바였기에 차라리 ‘익명’, 혹은 ‘오명’이라는 이름으로 오마쥬 앨범을 내면서 돌파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손심바가 이전 앨범 [전설]이나 [DOUBLECROSS MUSASHI]에서 보여준 특유의 랩 스타일은 호불호가 갈렸을지 언정, 메시지 전달이나 비트 초이스, 앨범 구성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며 어느 정도 능력이 입증된 래퍼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가 리얼 래퍼였다면, 리얼 래퍼가 되고자 했다면, 본인의 과오를 빠르게 인정하고 음악으로 돌파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
‘거물 래퍼 이센스와 엮이자마자 사건의 파급력이 급속도로 커졌다’는 것은 한편으로 한국 힙합의 아젠다가 아직도 특정 대형 인물 한두 명에 묶여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전까지 손심바라는 래퍼에 대해서 잘 모르던 라이트 팬들도, 이센스의 언급 한마디에 시선이 집중돼 그의 과거 행적이 모두 낱낱이 알게 됐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이번에는 손심바가 결국 110.12 본인이 맞았으니 다행이지, 만약 이 ‘대형 팬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이버 불링’에 의해 혹여라도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손심바가 해당 사건의 범인을 증명하는 과정에서는 논리적 프로세스만이 작동했던 것이 아니다. 손심바의 사생활 이슈, 혹은 랩 실력 거품 이슈 등 해당 사건과 관련이 없는 부분까지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본 사건에 대해선 (거짓말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손심바가 해명을 시도했을 때에도 힙합 팬덤은 논리적으로 사실 여부를 체크했다기보다는 덮어놓고 “어차피 거짓말이겠지”라는 삐뚤어진 시선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모택동의 ‘제사해 운동’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말 한마디에 중국 전토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한 것처럼, 거물의 한 두 마디에 씬이 좌지우지된다면 우리 역시 어떤 비극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비단 ‘110.12 사건’이 아니더라도, 한국 힙합은 미국에 비해 유난히 인터넷 관련 사건사고가 많은 듯한 느낌이다. 미국에서도 끊임없이 비판받고 있는 ‘인스타 갱’ 관련은 차치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버벌진트의 IP 사건이나 오왼의 ‘스스로 뜨거워지는 감자' 논란 모두 힙합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논란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블랙넛, 서리 크루는 모두 커뮤니티의 밈들을 (수위는 다르지만) 직접적으로 역수입해 가사로 녹여내 호응을 얻은 래퍼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 힙합이 시장 자체는 커졌지만, 0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인스타와 커뮤니티에 종속된 것만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해 준다. 한국에서는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기에, 많은 래퍼들 역시 커뮤니티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래퍼가 커뮤니티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커뮤니티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해결할 방법은 없는지에 대한 논의 역시 필요한 시점이 온 듯하다. 더 콰이엇은 ‘결국 우리 모두 다시 홍대로 돌아갈 것이다’고 했지만, 절반은 홍대가 아니라 인스타와 디시인사이드로 돌아가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한 랩의 기본적인 명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랩에서 일어난 일은 랩에서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손심바가 기존 여러 가사들에서 많은 래퍼를 비롯하며 디스 한 것은 ‘랩 게임의 일부’로서 즐길 수 있는 수준에서 끝냈어야 했다. 그 이슈를 너무 무겁게 다루며 랩 밖으로 끌고 오는 순간 ‘인스타 갱’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며, 그 논란의 가장 극단적이고 비극적으로 발현된 결과가 투팍과 비기의 디스 전일 것이다. 이 이슈는 비단 한국뿐이 아닌 미국에도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랩은 (극소수 래퍼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결국 ‘인생’이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음악의 수단, Play의 일부인 것이 바로 랩이다. 어깨에 들어간 그 힘은 조금 빼는 게 어떨까.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