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는 예술로 못 가버린 VJ에 대하여
2025년 1월 18일. 한국 힙합의 살아 있는 전설 버벌진트는 정규 9집 [HAPPY END]를 발표함과 동시에 “이번 앨범이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겨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많은 팬들이 그 말을 반쯤 ‘버벌진트의 은퇴 선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누명] 때도 마지막 정규라는 말을 했었기에 관심 끌기라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었다.) 다행히도 직후 브랜뉴뮤직의 대표인 라이머의 유튜브에 출연해 “정규는 마지막이지만, 음악을 은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기에 힙합 팬들의 걱정은 한시름 덜었지만, 정말로 슬픈 지점은 이러한 일련의 은퇴 소동이 앞서 말했듯 ‘잔잔한 파문’ 정도에 그쳤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최강자로, 또 한때는 대중 힙합에서도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던 버벌진트였지만 지금은 “마지막 정규 앨범”이라는 워딩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음원 성적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데, [HAPPY END]는 현재 발매된 지 1달이 넘었음에도 멜론에서 가장 많은 좋아요가 겨우 144에 그치고 있으며, 데일리 감상자 역시 270명 밖에 되지 않는다. 단순히 “인기가 떨어졌다”라고 하기에는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이 앨범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상황이다. 본 글에서는 지금의 버벌진트가 가진 문제점들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버벌진트의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텐데, 첫 번째 시기는 2001년에 발매된 데뷔 EP [Modern Rhymes EP]부터 2009년의 [The Good Die Young]까지다. 전술했듯이 정말로 언더그라운드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기이다. 기껏해야 “학교 종교 육교” 수준이던 기존 한국 힙합에 조PD 디스곡 ‘노자’와 [Morden Rhymes]를 통해 모음을 활용한 다음절 라임을 제시하며 몇 단계 끌어올렸고, 그 후 [무명]부터 [The Good Die Young]까지 이어지는 앨범 3연타와 중간중간 공개한 [사수자리] 믹스테잎에서는 정말 신들린듯한 플로우를 선보이며 ‘King of Flow’라는 별명까지 붙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설립한 크루 ‘오버클래스’는 스윙스, 산이와 함께 한국 힙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며, [누명] 앨범은 한국 대중 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앨범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하는 등, 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힙합 최고의 앨범으로 남게 됐으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 시기의 버벌진트는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졌을지는 몰라도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는 정말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 위치의 슈퍼스타였다.
두 번째 시기는 2010년 [Go Easy 0.5]에서 2015년 [GO HARD Part 1 : 양가치] (이하 양가치)까지다. 그를 언더그라운드에 가두기에는 씬이 좁았던 것일까, 2010년에 발표된 [Go Easy 0.5]는 말 그대로 ‘easy’한 트랙들을 가득 담아내며 대중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 한국 힙합 팬에게는 호불호가 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그러한 호오와 상관없이, 그는 계획대로 잘 나갔다. ‘좋아보여’, ‘굿모닝’, ‘충분히 예뻐’ ‘기름 같은걸 끼얹나’와 같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곡이 모두 이 시기에 발매된 곡이다. 높아진 인지도와 함께 각종 방송에 출연하는 와중에 (상대적으로) 조금 더 마이너하면서도 장르틱한 앨범 [양가치]를 발매한 것은 마치 “나의 뿌리는 여전히 언더그라운드 힙합이다.”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양가치] 발매 직후 세 번째 시기가 시작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음주 운전에 적발되고, 잠깐의 자숙기를 가진 뒤 싱글 ‘추적 (The Chase) / 진실게임 (True of False)을 시작으로 여러 장의 싱글과 EP, 그리고 정규 앨범을 발매했지만 큰 반향은 없었다. 대중성을 잔뜩 가미한 몇 장의 싱글만 그나마 트래픽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시기의 첫 정규 [변곡점]까지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만, 23년의 [K-XY : INFP]와 서론에서 다룬 [HAPPY END]는 부정적인 피드백마저 찾기 힘들었다. 음주 운전이라는 큰 논란이 있었기에 대중적 인지도가 큰 영향을 미치는 음원 성적 자체는 크게 떨어지게 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해당 논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관심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버벌진트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첫째로 타겟층 선정의 실패이다. 첫 번째 시기의 버벌진트는 언더그라운드 랩퍼답게 때로는 하드코어한, 때로는 재지한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누명]에 대입해 보면 ‘2008 대한민국’, ‘배후’와 같은 수위 높은 가사와 난해한 비트로 무장한 트랙이 있는 반면, ‘Tight이란 낱말의 존재 이유’ 같은 재즈 힙합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Losing My Love’ 이후 이어지는 트랙들은 그 어떤 때의 버벌진트보다 진중하기도 하다. [The Good Die Young] 앨범에서는 프로듀서 델리 보이 (Delly Boi)와 함께 당시 유행하던 서던 힙합을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 그 당시의 힙합 리스너들이 좋아할 만한 넘버의 장르이다. 이는 두 번째 시기에도 이어지는데, ‘대중을 노리겠다’라는 포부에 가깝게 그 어떤 힙합들보다 가벼웠다. 흔히 말하는 ‘발라드 랩’들은 힙합 리스너들은 만족하지 못했지만 대중들은 환호 시킬 수 있었다. 그 후 적당히 타협한 [양가치] 앨범은 떠나가던 기존의 힙합 리스너까지 일정 부분 다시 포섭하기에는 좋았던 앨범이다. 이렇게 이전까지의 버벌진트는 퀄리티를 떠나 매 시기마다 음악의 대상 층이 명확하게 존재했다. 언더그라운드 시절에는 언더그라운드의 리스너들을 노렸고, TV에 나오던 시절에는 대중들을 확실하게 노린 것이다. 모두를 아울러야 할 때는 확실하게 절충적인 앨범을 내며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앞서 언급했듯이 16년의 음주 운전 사고 이후 대중의 관심은 크게 떨어졌다. ‘굿모닝 (TEN PROJECT Part. 1)’과 같은 목적성이 다분한 추억팔이 싱글을 제외하면 확연히 줄어든 스트리밍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시 해야 할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힙합 매니아들의 민심을 사로잡는 일이어야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다. 반성문에 가까웠던 몇 싱글 뒤에 발매된 [변곡점]은 누명 시절이 떠오르는 재즈 힙합 넘버의 ‘Hey VJ’, 당시 유행하던 Plugg을 가미한 트랩 ‘Open Letter’, ‘불협화음’이라거나, ‘멍청트랩’이 연상되는 ‘내가 그걸 모를까’와 같은 트랙이 있었기에 그래도 일부 힙합 매니아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엔 적당했다.
문제는 [K-XY : INFP]이다. 모든 부분에서 Mac Miller를 비롯한 미국의 싱잉 랩 아티스트가 지나치게 떠오르며, 힙합 리스너들이 좋아할 트렌디한 사운드, 혹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할 재즈 힙합, 혹은 그의 랩 스킬을 뽐낼만한 트랙 그 어느 것도 들어가 있지 않다. 음주운전으로 인해 대중적 지지를 잃은 상황에서, 여러 이유들로 인해 힙합 자체에 대한 트래픽 자체도 떨어진 것이 지금 힙합 씬의 상황이다. 즉 골수 힙합 팬만 남아버린 지금 시점에서, 그 누가 이 가벼운 앨범을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그는 역대 앨범들 중 대중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최악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음주운전 논란 이후 처음으로 돌아가 순도 높은 80년대 뉴스쿨 앨범 [READMISSION]을 발매해 성적은 떨어졌어도 힙합 팬들의 지지를 다시 얻는 데는 성공한 허클베리피와 비교되는 행보이다.
두 번째로 메시지 측면이다. 버벌진트의 또 다른 강점은, 누구나 몰입 가능한 이야기를 서사로 잘 풀어낸다는 점이었다. ‘노자’에서 조PD의 수준 낮은 라임을 디스 했던 버벌진트는 이후 [Modern Rhymes]의 ‘Overclass’, ‘What U Write 4’등을 통해 그의 라임론을, 그리고 한국 힙합 수준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내며 리스너들을 몰입시켰었으며, IP 조작이라는 ‘누명’을 쓰며 음악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그는 곧장 [누명]을 통해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본인의 소회를 진실되게 풀어냈었다. 두 번째 시기의 버벌진트도 마찬가지다. 실제 사건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좋아보여’, ‘긍정의 힘’, ‘완벽한 날’ 등에서 보여준 구체적인 상황 설정과 생활 밀착형 가사를 통해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20대의 감성이 남아 있으면서도 본격적인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나이인 30대 초반이었기에 가능했던 가사였을 것이다.
[변곡점]에서는 그의 인터뷰 말마따나 “사고 이후 본인의 심경을 음악으로 담아낸” 앨범이었기에 어느 정도 리스너들의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리드머의 지적처럼 “시선을 외부로 돌리며, 유명인으로서 겪는 부침을 토로하는”, “본인을 향한 뒷담화에 경고를 날리는” ‘흑화의 뜻’, ‘공인’, ‘내가 그걸 모를까’와 같은 트랙들은 “설득력이 약하다”라는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진짜 문제는 [K-XY : INFP]에 있다. 본 앨범에서는 이별을 겪은 버벌진트가 여러 감정들을 풀어냈는데, 소기의 논란 이후 주목도가 떨어진 버벌진트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 알지 못했기에 아무리 전 여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봤자 첫 시기처럼 음악 외적인 이야기를 앨범에서 다뤄 몰입감을 형성한다는 메리트를 얻을 수도 없었으며, 40대가 된 버벌진트의 생활 밀착형 가사는 당연히 예전만큼의 센스를 느낄 수 없었기에 2030 힙합 리스너들의 큰 공감을 끌어내기도 어려웠다. 과거에는 “바람” 등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기도 했지만 최근의 사랑은 지극히 무난했는지 흥미를 유발할만한 소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주구장창 ‘음식’ ‘성격차이’ ‘후회’만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K-XY : INFP]는 혼자만이 공감 가능하고, 혼자만이 즐거운 독백 앨범으로 남아버린 것이다.
[K-XY : INFP] 앨범에서 리스너들을 실망시켰으면 다음 앨범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더욱 절치부심해 좋은 앨범을 냈어야 했건만 슬프게도 [HAPPY END] 역시 같은 노선을 밟는다. 음악적으로는, 조금 더 감성적이고 현악적인 사운드를 강조하긴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진 못했으며, 가사 역시 기존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키워드를 유지하면서도 카드값, 대리비, 저작권료 등 다양한 입출금 내역을 다루는 ‘머니랩’, 40대 미혼남의 잡념을 적어낸 ‘정자검사’, 이전 앨범의 ‘요리 랩’을 잇는 듯한 ‘TONY KAKU’, 부엌랩’ 등을 통해 조금 더 일상적인 소재로 파고들지만 마찬가지로 큰 공감대를 형성해 내지는 못한다. 첫째로 40대의 시점에서 쓰인 일상이기에 힙합의 주 청자인 10~30대가 쉬이 공감하기 어려우며, (리스너들 중에 정자검사를 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요리나 돈 얘기 역시 기발하긴 하지만 가사에서 별다른 재미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트랙 ‘SHIFTIN’ 역시 정규 앨범의 끝을 장식하기에는 너무나도 가사의 울림이 약하다. 그의 가사처럼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발을 내딛기 전의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이다. 만약 [누명] 시절의 버벌진트였다면 과연 이렇게 순하게 가사를 썼을까 싶은 순간이다.
요약하자면 [K-XY : INFP]와 [HAPPY END]는 음악적으로도 주 청자층인 힙합 팬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가사적으로도 음악 외적, 내적으로 팬들의 몰입을 전혀 이끌어내지 못한 앨범이다 그렇게 버벌진트는 두 번의 실패를 겪으며 그 누구보다 빠르게 잊혔으며, “마지막 정규 앨범”이라는 강수를 내세웠음에도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말았다.
물론 버벌진트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으레 40대에 접어든 뮤지션들이 그랬듯, 20~30대에 느꼈던 분노와 패기, 자신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일상과 미래에 대한 사소한 고민이 차차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가 밝혔듯 셀프 프로듀싱으로 정규를 여러 장 작업하는 과정에서 삶이 피폐해지며 지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콰이엇, 딥플로우 같이 끊임없이 발전하며 트렌드와 원숙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아티스트가 존재하기 때문에 버벌진트의 최근 행보는 더욱 비교가 되며 아쉬움을 남길 수밖에 없다. 한때 버벌진트와 마찬가지로 싱잉랩으로 노선을 튼듯한 두 아티스트였지만 최근 드럼리스라는 붐뱁의 새로운 장르에 손을 뻗으며 꾸준하게 트렌드와 본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잡았고, 가사 역시 OG의 시선으로 한국 힙합을 얘기하며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힙합 팬들이 몰입 가능한 소재를 다루기도 하였다. (딥플로우는 디스전까지 참전하면서 말이다!) 또한 계속해서 신인들을 발굴하고 함께 작업하며 자칫 무뎌질 수 있는 젊은 감각을 계속해서 갈아오려는 행보 또한 인상 깊지 않은가. 이런 두 OG를 보고 버벌진트의 앨범을 듣노라면 ‘마지막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버벌진트도 OG의 위치에서 현 한국힙합을 얘기하는 명반 하나쯤은 충분히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자꾸만 목에 걸린다.
비록 정규 앨범만 내지 않을 뿐이지 음악 활동은 계속한다고 밝혔기에 다음 작업물에서는 한결 힘을 뺀 믹스테잎이나 싱글을 기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버벌진트만의 이야기가 담긴 ‘제대로 된’ 정규 앨범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못 아쉽다. 이 양반. 갈 때는 예술로 가지 못했다.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