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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튜버가 케이팝을 추구하면 안되는걸까

서브컬처에서 찾은 버추얼 아티스트 음악의 미래

by 고멘트



버튜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세계아이돌과 PLAVE(플레이브)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세계아이돌은 ‘KIDDING’, ‘Stargazers’ 등이 멜론 HOT100 차트 1위를 기록했고, ‘RE:WIND’와 ‘KIDDING’ 뮤직비디오는 조회수 2,000만 회를 넘겼다. 또한 ‘이세계 페스티벌’과 멤버 릴파의 단독 콘서트 등 온·오프라인 공연도 활발히 진행해왔다. 플레이브 역시 아시아 투어와 KSPO돔 단독 콘서트를 열었으며, 멜론 누적 스트리밍 20억 회, 앨범 [Caligo Pt.1]의 초동 103만 장 등 실물 케이팝 아이돌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다소 낮을 수 있지만, 스텔라이브도 국내 버튜버 씬을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1기 멤버인 아이리 칸나와 아야츠노 유니도 단독 콘서트를 진행했고, 아이리 칸나의 ‘최종화’는 유튜브 뮤직 조회수 2,000만 회를 넘어섰다. 아뽀키 역시 틱톡 팔로워 430만 명 이상을 보유한 대표적인 국내 버튜버로,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플레이브 팬콘서트 'Hello, Asterum! ENCORE'의 실황영상



이들 모두 주목받고 있지만, 각자의 음악적 방향엔 차이가 있다. 플레이브와 아뽀키는 케이팝 중심의 음악을 추구하고, 이세계아이돌은 케이팝과 제이팝을 병행하고 있으며, 스텔라이브는 제이팝을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적 방향성이 뚜렷하게 다른 만큼, 팬들 사이에서는 ‘버튜버는 제이팝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꾸준히 맞서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단지 세 그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버튜버 씬 전반에서 이어지는 흐름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버튜버가 음악 외의 콘텐츠도 진행하지만, ‘노래’는 여전히 버튜버들이 가장 쉽게 주목받고, 가장 확실하게 성과를 내는 콘텐츠다. 단순히 유명곡을 커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오리지널 곡을 발매하고 차트를 기록하거나 콘서트를 여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단순히 버튜버를 넘어, 실물 아티스트와 다른 정체성과 매력을 지닌 ‘버추얼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어떤 음악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






5,5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우타이테 헤비의 'Henceforth' 커버영상. 헤비는 최근 버추얼 아티스트로 재데뷔하였다.


버튜버의 주요 팬층은 애니메이션, 게임, 보컬로이드, 우타이테 등 서브컬처에 익숙한 소비자들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제이팝에 대한 이해도와 수용도가 높고, 버튜버 자체가 일본의 ‘키즈나 아이’에서 시작된 만큼 일본은 여전히 가장 큰 시장이다. 대표적인 버튜버 MCN인 홀로라이브와 니지산지의 음악 스타일을 보면 팬들이 선호하는 제이팝 요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돌 특유의 귀여움을 강조한 스타일부터 EDM과 록이 결합된 빠른 템포의 야호성, 파워풀한 가창을 앞세운 제이락 스타일까지 다양한 장르가 커버와 오리지널 곡 형태로 등장한다.


이런 흐름은 국내 버튜버 씬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스텔라이브는 제이팝 기반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아이리 칸나의 ‘최종화’는 제이락 스타일이며, 아야츠노 유니의 ‘내꺼하는 법’, ‘SUPADOPA’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씬에서 파생된 카와이 퓨처 베이스 장르에 가깝다. 스텔라이브가 제이팝뿐만 아니라 일본 버튜버 씬과 서브컬처 문화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소속 멤버들의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짓고, 모든 멤버가 일본어가 가능해 종종 일본어로 방송을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3기 멤버들은 RP(버튜버가 지닌 고유의 설정. 판타지적인 특징이 많다)를 강조하며 일본 버튜버 씬과의 유사성을 더욱 강화했다. 해외 버튜버들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영어권과 동남아권은 홀로라이브 EN, 홀로라이브 ID 소속 버튜버들이 강세인데, 이들 역시 유명한 일본어 곡이나 제이팝 스타일 음악을 자주 선보이고 방송에서도 관련 문화에 대한 언급이 잦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버튜버들도 있다. 플레이브는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아닌 웹툰 스타일의 캐릭터 디자인과 10대~30대 여성에게 친숙한 K-아이돌 스타일링과 함께 케이팝 작곡팀 Vendors와의 협업하며 케이팝의 작법과 프로덕션 안에서 일렉트로닉, 록, R&B 등의 장르를 시도하고 있다. 아뽀키는 EDM, 하우스, 드럼 앤 베이스 등 전자음악 장르를 실험하며 다소 팝에 가까운 사운드를 추구하지만, KARD 전소민의 피처링이나 Coach & Sendo, Cazzi Opeia 등 케이팝 작곡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케이팝스러움을 유지한다. 이세계아이돌 역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하고, RP보다는 서사 중심의 전개를 강조한다. 더불어 케이팝 여자 아이돌의 곡을 자주 커버하고 비슷한 느낌의 오리지널 곡을 발매하고 있는데, 대표곡 ‘KIDDING’은 반복되는 중독성 강한 후렴구가 특징인 전형적인 케이팝 스타일의 댄스 팝 장르이고, 최근 발매한 [Stargazers] 역시 케이팝에서 자주 쓰이는 시티 팝, 훵키한 댄스 팝 장르로 채워져있다.


하지만 이들도 서브컬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플레이브의 앨범 제목에서 등장하는 ’ASTERUM’, ‘Caligo’와 같은 단어들은 모두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으며, ‘Dash’의 뮤직비디오는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은 연출이 돋보이고, 소통 방송에서는 각자의 RP에 맞춘 이펙트를 활용한다. 이세계아이돌은 아이돌이라기보다는 스트리머로서의 정체성이 보다 짙은 편이다. 커버 곡 또한 한국어로 번역을 하기도 하지만 애니메이션 OST나 유명한 제이팝 곡을 자주 커버했으며, 오리지널 곡도 데뷔곡인 ‘RE:WIND’부터 최근 발매한 ‘Misty Rainbow’ 모두 서정적인 멜로디와 극적인 편곡이 두드러지는 전형적인 제이락 스타일의 곡이다.



싸이코드 - 'DECISION' 안무 연습 영상

이쯤 되면, ‘K-아이돌을 지향하는 버추얼 아티스트가 실물 아이돌과 경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케이팝은 점점 더 많은 비용과 기술을 투입해 높은 퀄리티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해외의 유행을 빠르게 캐치한 트렌디한 음악과 세계적인 아티스트와의 협업, 화려한 CG와 VFX를 결합한 뮤직비디오는 실물 아티스트와 결합되어 더욱 예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반면 버추얼 아티스트는 아직까지 기술적 한계와 버추얼이라는 형태에서 오는 거부감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더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하거나 더 유니크한 음악을 시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실물 아이돌은 기획사의 자본과 트레이닝, 수년간 쌓인 노하우로 정교하게 제작되고 있다. 실제로 플레이브 이후 싸이코드, SKINZ 등 비슷한 포맷의 케이팝 지향형 버추얼 그룹들이 여럿 등장했지만, 이들 중 플레이브만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플레이브는 블래스트의 적극적인 투자 아래, 훨씬 높은 퀄리티의 캐릭터 디자인과 안정적인 3D 퍼포먼스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음악 방송 출연, 팬사인회, 포토카드 및 굿즈 판매, 오프라인 팝업스토어 운영 등 현실 케이팝 아이돌의 활동 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멤버들 역시 실제 아이돌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감 있게 소화해 내고 있다. 반면, 타 그룹들은 외형적인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보이는 경우가 많고, 프로모션 전략이나 오프라인 팬 이벤트 등 팬들과의 접점에서도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플레이브처럼 아이돌 산업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그에 걸맞은 기술력 및 콘텐츠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다면, 버추얼 아티스트가 실물 아이돌과 동일한 무대에서 경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추얼 아티스트로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케이팝 아이돌과는 차별되면서도 버추얼 포맷이 가장 메리트를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서브컬처일 가능성이 크다. 이미 버튜버 팬덤과 서브컬처 팬덤은 큰 교집합을 이루고 있고, 서브컬처 팬덤은 이미 일본을 넘어 미국, 동남아, 유럽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국내의 애니메이션·서브컬처 게임 시장 역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더불어 버추얼 아티스트가 다른 팝 장르보다 제이팝 기반의 음악을 시도했을 때 더 큰 반응을 얻는 경우도 많다. 홀로라이브 EN, 홀로라이브 ID 소속 버튜버들의 경우, 일본어 곡이나 제이팝 스타일 곡이 상위권 조회수를 기록하는 일이 빈번하다. 서브컬처 친화적인 팬덤의 취향과 콘텐츠 소비 방식이 음악 성과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음악은 서브컬처 팬덤이 아닌 일반 리스너들에게도 이미 유효하다. YOASOBI, Yorushika, Ado, ZUTOMAYO, LiSA 와 같은 야호성, 제이락 장르 아티스트들의 내한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감성을 흡수한 국내 아티스트들도 등장하여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QWER의 '고민중독', '내 이름 맑음'은 여전히 음원차트 장기집권 중이며, 달의 하루의 '염라(Karma)'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는 3,000만 회에 육박한다. 최근 몇 년간 핫한 인디밴드 씬에서도 유사한 감성의 음악들이 자주 들리고 있다.


달의 하루 - '염라(Karma)' MV



다만 서브컬처 기반의 음악이라 하면 보통 야호성, 제이락 계열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상으로 영역을 넓혀 장르가 획일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티스트들이 가장 많이 시도하는 애니메이션 음악은 팝, 록, 발라드 등 대중적인 장르를 기반으로 감정선이 강조되거나 화려한 편곡이 두드러지며, 흔히 제이팝, 제이락으로 구분하는 장르들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게임 음악은 일렉트로닉, 재즈, 칩튠, 클래식 등 장르의 스펙트럼 자체가 매우 넓으며, 보컬로이드 음악은 빠른 템포와 특유의 인위적인 음색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록, EDM, 발라드 등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적으로 시도한다. 이러한 서브컬처 장르 음악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한다면, 더 몰입도 있고 개성 있는 음악이 가능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서브컬처는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의 문화다. 그렇기 때문에 실물 아티스트보다 버추얼 아티스트가 이를 구현하고 소화하는 데 더 적합하다. 웹툰이나 라이트노벨이 애니화될 때보다 실사화될 때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버추얼 아티스트가 진짜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지점은 서브컬처 안에 있다.





by. 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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