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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혁 절대 천재 맞습니다

우리 찬혁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by 고멘트




b4790bda-2693-408a-b965-a7fc29057783_1751439785372_thumbnail.jpg <이찬혁 영감의 샘터: 마지막 한 방울> 전시


2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드라이브만 하는 영상은 ‘괴짜’, ‘지디병’이라는 수식어가 붙기엔 다소 귀여운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뒤에는 늘 예술에 대한 실험정신과 강한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도 한복판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퍼포먼스, 창작의 과열 속에서 소진되어 가는 영감을 역으로 바꾸려 했던 전시회까지. 이찬혁은 일상의 기묘한 순간들마저 예술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누구도 예상치 못할 궤적을 그려왔다.


그는 언제나 ‘다르게 하려는 사람’이었다. 파격과 장난이 뒤섞인 그의 태도는 어느 순간 팬들 사이에서 “우리 찬혁이 하고 싶은 거 그만해”라는 농담 섞인 밈을 낳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의 행보는 쉽게 따라가기 어려웠으며, 때로는 그 속내를 해석하는 일조차 난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한 다름이 항상 설득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이찬혁 (LEE CHANHYUK) - ‘파노라마 (Panorama)’ M/V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퍼포먼스 끝에 공개된 솔로 1집 [ERROR]는 ‘죽음’이라는 강렬한 테마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지만, 음악적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위켄드식 신스팝의 문법에 지나치게 기대었다. 특히 ‘파노라마’는 위켄드의 ‘Save Your Tears’를 연상케 하는 신스 라인과 드럼머신, 그리고 보컬 믹싱 방식까지 닮아 있어 장르의 클리셰에 갇힌 듯한 인상을 남긴다. ‘죽음’이라는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음악은 지나치게 익숙한 사운드 위에 얹혀 있어 감정의 고조 없이 평면적으로 흘러간다. 이처럼 장르의 외형은 화려했을지언정, 그 안에서 이찬혁만의 예술적 서사는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 채 묻혀버린 것이다. 신선한 기획 의도와는 달리, 그만의 고유한 예술관이나 내면의 서사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채, 오히려 유행을 따라간 평범한 장르에 갇혀버렸다는 것이, ‘다르게 하려는 사람’이라는 기존의 정체성과는 다소 어긋나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천재란 가끔은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확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찬혁은 대중적으로 굳어진 악뮤의 이미지에 안주하지 않았고, 밴드 BABO를 중심으로 보다 명확한 장르 실험을 감행하며 자신을 갱신해 나갔다. 이러한 축적의 흐름은 마침내 솔로 2집 [EROS]에 이르러 하나의 농밀한 결정체처럼 응축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12월, 이찬혁은 밴드 ‘BABO’로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당시 대중 음악계 전반에 락의 부흥 흐름이 감지되던 시점이었기에, 그의 행보는 자칫 취미 삼아 유행을 뒤쫓는 시도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찬혁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인디 씬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넓혀가던 슈게이징과 노이즈락의 조류 속으로 과감히 몸을 던진다. 이는 그 스스로를 더 낯설고 불편한 지대로 밀어 넣는 선택에 가까웠다.


BABO - Complicated


첫 트랙부터 그는 강렬한 디스토션과 싸이키델릭한 텍스처를 노이즈의 형태로 쏟아내며, 앨범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이어지는 ‘뺨’에서는 앞선 소음의 잔재를 정돈하듯, 다시 선명한 멜로디로 전환한다. 이 변환은 악뮤에서 보여주던 감정의 결과도 어렴풋이 연결되며, 보다 마이너한 정서를 유려하게 끌어올렸다. ‘별별별별’과 ‘Danso’에 이르러서는 다시금 날이 선 노이즈와 의도적으로 배치된 불협의 사운드가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소음의 미학을 거침없이 확장해 간다. ‘Thanks, liar’에서 마침내 이찬혁 특유의 서정성과 드림팝의 잔상이 희미하게 떠오르지만, 곡 전체를 주도하는 건 여전히 거칠고 날카로운 기타 톤이다. 익숙한 감성은 곡의 주변부에 머물 뿐, 중심에는 마치 감정을 찢어내듯 끌어올리는 불편한 사운드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찬혁의 음악 세계와는 전혀 낯선 풍경이다.


그는 미래지향적인 사운드를 탐색하면서도, 예쁘고 정제된 멜로디보다는 날것의 감각, 불균질한 소리, 정제되지 않은 불편함을 기꺼이 끌어안았고, 청자 역시 그 불편함을 피해 갈 수 없게끔 곧장 마주하게 만든다. 그는 어떤 장르에도, 어떤 틀에도 안주하지 않으려는 듯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BABO는 이찬혁의 일시적인 확장이 아니라, 그를 이루는 또 하나의 본질로 자리하게 되었다.





한겨울을 울부짖던 기타 소리를 뒤로한 채, 이찬혁은 여름의 한복판에서 솔로 2집 [EROS]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전작 [ERROR]에서 선보였던 신스팝과 디스코의 뼈대는 유지하되, 여기에 흑인음악의 가스펠적 울림, BABO를 통해 실험했던 록의 거친 질감을 은은하게 녹여냈다.


이찬혁 (LEE CHANHYUK) - ‘비비드라라러브’ M/V


‘비비드라라러브’는 [ERROR]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표적인 곡이다. 코러스에는 과감하게 침묵을 삽입함으로써 감정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의도적으로 비워낸 여백을 통해 해석의 층위를 더했다. 이로써 자칫 가볍게 들릴 수 있는 멜로디 위에 복합적인 정서가 자연스레 스며든다. 과거에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간극이 곡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면, 이번에는 그 간극 자체를 하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셈이다.


이찬혁 (LEE CHANHYUK) - '멸종위기사랑' M/V


‘멸종위기사랑’은 종교적 모티프와 종말의 서사를 엮어내며 가스펠적 화성 진행과 반복되는 구절로 곡에 무게감을 더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진중하게만 흐르진 않는다. 하나님을 찾으며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끝내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찬혁표 가스펠은 유머와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곡은 해학과 성찰이 나란히 병존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게 된다. 한편 ‘Andrew’는 악뮤 시절의 서정성과 BABO에서 체득한 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이찬혁의 정체성을 집약해 낸다. 앨범 전체가 신스 기반의 사운드로 두껍게 칠해져 있지만, 그 위에는 흑인 커뮤니티의 저항과 해방의 정서를 품은 훵키한 리듬, 영적인 에너지를 머금은 가스펠풍 코러스, 그리고 드림팝의 몽환적인 사운드스케이프가 유기적으로 얽히며 복잡하면서도 질서를 이룬다. 그로 인해 앨범은 서로 다른 장르들이 충돌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싸안으며 하나의 질감으로 수렴되었다.


전작이 신스팝의 외형적 질감에 집중했다면, 이번 앨범은 같은 기반 위에 풍부한 텍스처와 섬세한 내면의 진폭을 더해 입체적인 감정선을 그려 낸다. 서사의 출발점은 타인의 죽음에서 비롯된 결핍이다. 그 부재의 여백을 사랑으로 채우며, 냉소와 희망, 좌절과 기대처럼 서로 상반된 감정들을 분절하지 않고 한 줄기의 흐름으로 엮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주되지만, 감정의 톤과 무드는 끝까지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이로써 앨범 전체는 하나의 정서적 궤적을 따라 어느 한 지점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탄탄한 구조를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정서와 구조, 주제와 형식 사이의 조율은 더욱 정교해졌고, 이는 단순한 실험적 시도의 나열이 아니라, 흩어진 아이디어들을 하나의 서사로 응축해 낸 치밀한 설계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감정이 흐르는 방향에 있다. 이찬혁은 감정의 어두운 결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슬픔을 들뜬 멜로디에 실어 보내고, 고요한 비애를 경쾌한 리듬에 담아내는 자신만의 역설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직조한다.


이찬혁 (LEE CHANHYUK) - SINNY SINNY


오프닝 트랙 ‘SINNY SINNY’는 타인의 죽음을 담담히 노래하지만, 그 차분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슬픔을 가스펠처럼 초월해 버리는 태도에 가깝다.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앨범의 정서적 결은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비비드라라러브’에서는 “상한 포도알이 다시 신선해지나”라는 가사를 통해 되돌릴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던지고, ‘멸종위기사랑’에서는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라는 가정 아래, 결국 모두가 모두를 사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되묻는다. 이 모든 시선은 단순한 낭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찬혁의 차분하면서도 명징한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지막 트랙 ‘빛나는 세상’에 이르면, “빛나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그런 걸 바라는 우린 빛이 날 거야” 라는 구절이 보코더의 왜곡된 음색 속에서도 뚜렷하게 새겨진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구원이 아닌, 각자의 내면에 깃든 빛을 마주하려는 고백이자, 스스로의 믿음을 향한 조용한 선언처럼 들린다.


이러한 감정의 일관성과 층위 덕분에, 앨범은 밝음 속의 슬픔, 경쾌함 속의 쓸쓸함이라는 이중적 정조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특히 들뜬 멜로디에 얹힌 고요한 비애는 이찬혁 고유의 감정 코드로 작용하며, 마치 도시의 무수한 영혼들을 조용히 추모하듯 섬세하게 퍼져나간다. 그것은 감성의 산발적인 나열이 아니라, 삶과 죽음, 신앙과 회의, 사랑의 시작과 끝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통합해 낸 음악적 에세이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했듯, 이찬혁은 언제나 ‘다르게 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EROS]는 분명히 그 다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변주나 진화라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그의 음악적 파편들이 이 앨범에서 단단하게 응집되었고, 이제 자신이 어떤 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넘어, 왜 그 소리를 내야만 하는지를 음악으로 말하려 하고 있다.


이찬혁 (LEE CHANHYUK) - '돌아버렸어' M/V


이번 앨범은 신스를 중심축으로 삼은 채, 그 위에 가스펠의 영적 울림을 얹고, 훵키한 리듬과 록의 거친 질감을 적절히 배합하며, 다층적인 텍스처를 구현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음악적 요소를 꿰뚫는 정서의 핵심은 ‘결핍’이다. 타인의 죽음이 남긴 상실감, 그 상실이 피워낸 사랑, 그리고 사랑을 둘러싼 인류애적 고찰까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이 정서적 고리는 각 트랙마다 고유한 색을 띠되 하나의 통일된 감정선으로 연결된다.

그 결과 [EROS]는 단순히 스타일의 스펙트럼을 넓힌 트랙들의 모음이 아니라, 고도로 정련된 구조물처럼 완성되었다. 낯설게 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인위적이지 않으며, 진솔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더 이상 ‘괴짜’ 아티스트의 일탈이 아닌, 이찬혁이 예술의 지평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결과다. 그리고 이는 그를 마침내 ‘진짜’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한 성취다.


진정한 천재성이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먼저 포착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지나쳤던 그 감정들을 다시금 낯설고도 생생하게 꺼내어 우리 앞에 펼쳐 보일 수 있는 용기, 바로 그 감정을 직조해 내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EROS] 속 이찬혁은 바로 그 힘을 손에 넣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다르게’ 가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깊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단순히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는다. 결국 우리가 이찬혁을 향해 괴짜와 천재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같은 숨결로 말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by. 율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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