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아이브) - [IVE SECRET]
그룹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크게 자리 잡는 시기는 3~5년차이다. 새로움과 당연함 사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유의미한 성적을 얻기도 하며 그룹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방점이 아닌 분기점이라 얘기한 이유는, 이 본격적인 활동이 꼭 잘만 풀리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는 그룹의 미래가 원만하게 흘러갈 지 평가하게 되는 중간고사와 비슷하다.
중간 연차에 일어나는 희비 교차는 지금까지의 사례를 살펴보며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룹은 데뷔 초기의 곡이 커리어 하이가 되고, 그 이후로는 점점 존재감이 옅어진다. 연차가 지나며 나이 변화 등의 이유로 이미지와 화제성에 감가상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대표 주자인 있지를 비롯, 유통기한이 짧았던 발랄함 이후 급한 이미지 변화로 놀랍게도 화제성이 떨어졌던 ‘I CAN’T STOP ME’ 전후의 트와이스가 그러하다. 그 와중에 새로운 무기를 발굴한 그룹들은 오히려 신인 때는 상상치도 못했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데뷔 당시 콘셉트보다 새로 만든 이미지로 날아오른 아이들, 오마이걸과 같은 사례도 있고, 이미 “트레블”로 일컬어지는 3대장 포지션이었지만 거기에 실력과 무대 장악력 등의 무기를 적극 활용해 해외로 나아간 블랙핑크도 있다. 에스파 또한 유행이 끝나가던 강한 세계관인 “광야”를 벗어나며 정상에 올랐기에 어쩌면 이러한 성공 사례를 밟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을 살펴보면, 초기 성적이 꼭 유지되지만은 않고 실망감을 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의 성패를 가른 것은 데뷔 콘셉트가 아닌 새로운 콘셉트인 만큼, 그룹의 미래에 더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중간 연차 시기의 이미지 변화 또는 발전이다. 따라서 그룹들은 이후 이어 선보일 무기를 심사숙고해서 마련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세밀한 장점 분석이다. 이전의 장점까지 뿌리를 뽑거나, 혹은 부정확한 이미지 분석 때문에 급성장이 일어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다. 결론적으로는 객관화된 분석을 기반으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변화를 머뭇거리며 새로움을 제공하지 못하면, 빠르게 변하는 K팝 씬의 소비자들은 바로 올드하고 감 떨어진 그룹이라 여겨 금방 질려할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3세대의 후광이 약해져 가던 2022년~2023년은 K팝의 “얼터너티브”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바라보기 시작하며 해외의 장르(브레이크비트 류 EDM 등)가 적극적으로 유입되고, 숏폼이란 뉴 미디어가 곡과 안무 등 여러 부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브는 K팝의 전형과도 같은 모습으로 오히려 차별화 포인트를 잡았다. 미니멀한 트렌드와 대조되는 큰 다이나믹 레인지의 송폼, 따라 부르기 쉽고 익숙한 탑라인, 그리고 고음 등의 소위 “뽕 차는” 포인트. 아이브의 곡은 누가 들어도 K팝이었기에 오히려 아는 맛의 무서움이 있었다.
그 당시 또 다른 K팝의 진화 포인트인 보다 디테일한 콘셉트 구축으로 다소 뻔할 수 있는 곡에 매력을 보충해 냈다. ‘LOVE DIVE’ 속 호수에 DIVE 한 나르키소스, 뻔한 MBTI에서 따왔지만, I와 E 사이 V를 얹으며 IVE 스스로를 담아낸 ‘Either Way’. 익숙하기만 한 아이브의 곡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이런 가사와 콘셉트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의 깊이 때문이다. 이 만만하지 않은 익숙함으로 아이브는 아이돌의 사전적 의미인 우상과도 같은, “따라 하고 싶은” 그룹이 되어 10대 팬을 불러 모았다. 거기엔 앞서 언급한 따라할 만한 요소(멋있는 주제와 쉬운 곡) 외에도 확실한 스타성이라는, 아이돌의 가장 기본적인 매력도 한몫 했다.
이처럼 원래도 가장 K팝스러운 아이브였지만, 어쩌다 보니 아이브는 거의 유일한 적통이 되어버렸다. 걸그룹이 다시 득세하던 데뷔 때와는 달리 시장의 축소, 논란 등의 여러 이유로 그나마 그 영광을 유지하고 있는 동기들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정도를 홀로 걷고 있는 아이브는 앞선 그룹들의 역사를 통해 중간 연차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분명하고 익숙하지만, 단편적이지 않은 디테일이 공존한다는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당연하지 않은 새로운 모습의 제시가 바로 그것이다. 과연 이번에 아이브가 가져온 [IVE SECRET]은, 아이브를 정답지로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이브가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가장 큰 부분은 아무래도 “자기애”라는, 정체성과도 같은 키워드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자아에 대한 메시지는 마치 엘도라도의 골드 디거처럼 너무 많은 그룹들이 빠르고 강하게 소모하다 보니 짧고 굵게 지나간 흐름이 되어버렸다. 다행이도 2년간의 “나르시시즘”의 장을 마무리한 뒤 “SWITCH”에선 변화를, “EMPATHY”에서는 “우리”로의 확장을 통해 서사를 다양하게 꾸려오고 있다.
이번에는 오히려 [IVE EMPATHY] 때와는 반대되는, “자신의 내면”으로 다시 포커스를 옮기며 “자기애”를 “자기”로 심화해 나간다. 인공 눈물, 거짓말, 암호 등의 상징을 통해 겉보기와는 다른, 스스로 안에 있는 것들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XOXZ’라는 타이틀 곡 제목 또한 기존의 규칙이 아닌 “나”에게 온전히 맞춰진 암호를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아이브가 다뤄온 자아와는 차이가 있는데, 어두워진 곡 무드에서 알 수 있듯 밝고 교훈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어둡든 밝든 구분하지 않고 “자아”로서만 대하며 오히려 더 진실되고 입체적인 모습을 그려낸 점에서 “성숙함”을 위한 빌드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그것도 너무 급진적이지 않게 적당히. 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 실책이 남았는데, 주제의 적합성과 별개로 구현 방식에서 아이브의 장점이 사라졌단 점과, K팝에서는 그렇게 새롭지 않은 주제라는 점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 나만의 법칙, 다양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내면을 나타내긴 하지만, 연결성이 낮아 너무 넓게 퍼져 있다. 거기에 이를 한 데 아우를 수 있는 키 메시지의 부재 때문에 앨범이 뇌리에 강하게 박히지 않는다. 보통은 코러스 가사가 함축적으로 의미를 남기는데, “나의 모든 것을 다 원한다는 내용”은 다른 요소들과는 공유되지 않아 앨범의 핵심이 되어주진 못했다. 이전까지의 아이브가 직관적인 메시지 하에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메타포로 의미를 분명하게 하면서도 뜯어보는 재미를 더했던 점을 생각하면, 그 장점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시 내면, 자아로 다시 돌아간 주제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탐구로 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단 접근은 사실 “자아”를 다루던 그 시기에 갑자기 자아를 이식하던 그룹들이 모두 하던 시도이기도 하다. 감정에 솔직해진다, 나의 내면으로 초대한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오마이걸의 ‘비밀정원’에서도, 프로미스나인의 ‘Feel Good (SECRET CODE)’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주제도 소재도 그다지 새로운 전환 시도는 아니다. 그리 먼 시절의 복각도 아니며 아이브가 한다고 해서 신선함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근시대의 문법을 가져오기만 하여 기시감이 드는 건 음악도 마찬가지다. 분명 아이브의 “정석적인 K팝 곡”은 접근성과 유행이라는 무기를 안겨주었다. 단, 간과하기 쉽지만 이는 그저 K팝이 익숙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뽕끼”가 달아준 것이다. 그러나 장점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세부적인 분석 없이 그저 K팝의 관습만을 가져온 결과가 타이틀 곡 ‘XOXZ’다. 전소미의 ‘XOXO’에서 O만 Z로 바꾼 듯한 코러스의 챈트는 물론 기타의 유무를 제외하곤 악기 구성마저 비슷하다. 오케스트라 힛을 통한 첫 박의 악센트가 더해진 808 드럼 및 베이스, 이 구성은 바로 직전 세대 K팝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점이었던 흔히 말하는 “뽕 차는” K팝식 빌드업이 눈에 띄지 않고 밋밋하다. 아이브가 사용해야 했던 K팝의 익숙함은 한 철 지난 사운드 따위가 아니라 세대 무관 심리를 자극하는 구성이었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아이브는 자체적인 새로움도 필요하지만, K팝의 정상을 향하는 만큼 그저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기보단 그것을 정말 잘하거나 아예 새로운 것을 가져와야 만족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남들도 다 하니 그저 따라 했을 뿐인 프로모션이었다. 많은 그룹이 활용하고 있는 공식 인스타 부계정은 “SECRET”이란 앨범의 주제에는 꽤 적합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그룹들에 비해 추리하는 재미가 있다거나 특별한 운영이 있진 않고 그저 비하인드 포토가 올라갈 뿐이었다. 거기에 외부 사이트의 숨은그림찾기와 십자말풀이는, 게임적 재미를 찾기도 어렵고 완성도도 돋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인 구성이 되어가는 웹사이트 또는 게임을 사용한 프로모션은 가장 신선하고 독특하게 활용하기 좋은 플랫폼인 만큼, 퀄리티와 콘텐츠의 구성을 정말 잘 신경 써야 한다. 가뜩이나 많이 쓰고 또 활용 가치가 높은 만큼 비교하기 쉬울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하면 다르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밖에?”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러한 프로모션은 기억에 완전히 지워졌고, 결국엔 또다시 화제가 된 것은 장원영의 군대 체험이었다.
애초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안 한다. 그리고 기대를 버리고 봐도 이번 앨범은 너무 진부했다. 앞서 살펴본 3년차에 해야 할 두 가지 모범 답안(기존의 장점 유지하기, 새로워지기)에 맞춰 생각해볼 때, 이번 앨범은 아이브에게 정답이 되어 주긴 어렵다고 채점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해 왔고, 누구나 하고 있는 기시감과 함께 아이브라 할 수 있는 것들의 실종으로 인해 당연한 앨범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K팝의 작법에서 오는 든든한 친숙함이 아닌 뻔함만이 담겨있는 앨범인데, 아이브는 당연하기만 한 그룹이 아니다. 그저 지금껏 만들어온 공통적인 형질만 따라가는 범생이 같은 앨범이 아닌, 단단한 기본기를 통해 심화 문제를 풀어 나가는 우등생이 되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K팝 걸그룹들의 커리어에는 마치 템플릿 같은 경로가 있다. 빛나는 데뷔 n연타로 등장한 뒤, 점점 밋밋한 콘셉트로 기대치가 낮아지다가, 방향성을 잃고 1년에 한 번 정도 의무적인 활동을 반복하는 커리어의 중후반기. 이러다 보면 수납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하고, 그 이유에는 “곡이 좋았다면”, “섹시 콘셉트를 버렸다면”과 같은 조건이 붙기 시작하는 그러한 일들까지가 템플릿이다. 이 루트의 핵심은 앞서 말했듯 하락세의 조짐이 만들어지는 중간 연차이다. 지금 당장 아이브가 하락세가 시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템플릿의 조짐이 보이는 이번 활동이었다. 슬슬 새로운 매력이 보여야 하는데, 그러한 점이 없다 보니 과연 지금의 권력이 언제까지 유효할까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K팝의 족보를 이어갈 수 있는 그룹 또 하나가 그저 그런 그룹으로 저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예 멤버들의 역량적 성장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든, 멋있던 모습에서 더더욱 멋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든, 체급을 업고 아이브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한 목소리를 내든. 혹은 너도나도 하는 K팝 속 요소의 퀄리티를 확 올리든. 뭔가 지금까지 3년을 돌아보며 어떻게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스스로 냉철한 자기 점검과 여기서 출발한 날카로운 새로운 매력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껏 만들어온 아이브의 불씨가 점점 약해지기 전에.
by. 플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