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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식한 놈들의 음악 트집잡기
(25년 9월 2주)

연수, 웬디, 호미들, Big Thief, Blood Orange 외

by 고멘트

"알앤비 고수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이별의 늪"


1. 연수 – [내가 널 떠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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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가든 : 길을 걷다 우연히 누군가의 일기장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자. 이걸 내가 봐도 되는 걸까 싶어 괜시리 미안해지는 기분. 이번 두 번째 정규앨범에는 그만큼 가감 없이 이별에 관한 감정이 담겼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진 초가을이라 이미 이별을 겪었거나 앞두고 있는 누군가들이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엔 시기적절할지도 모를 발매 시기다. 사실 필자는 앨범을 들으면서도 여러 번 되짚어 확인했다. '내가 기억하던 그 아티스트 연수 맞나?' 근데 같은 사람이 맞았다. 그의 전문 장르라고 생각했던 알앤비로부터 경로를 틀어 사뭇 달라진 장르와 사운드로 가득 채워진 앨범이 다소 낯설었을 뿐.


프로듀서 구름과 협업 이후 모든 트랙을 독자적으로 창작했던 첫 번째 정규앨범 [no love]에서 최애 트랙이 있다면, 서정적이지만 리드미컬한 리듬이 뒷받침해 준 ‘Weak’와, 일렉트릭 베이스가 중심이 되어 트렌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Sad dance’, 이 두 가지이다. 그렇기에 이번 정규의 트랙 간 사운드 측면에서 더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곡이 앰비언트 성질의 패드 기반이고 리버브를 아낌없이 입힌 일렉기타나 키보드가 레이어를 얹어준다. 색다른 트랙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침묵이 그 대답이 될 것이다. 다만 악기의 셈여림을 극적으로 조절하며 곡 각각의 전개에 초점을 두고자 한 듯하다. 3번 트랙에서, 6분 내내 텅 빈 텍스처의 차분한 공간감이 이어지다 40초가량을 남겨두고 절정에 가까운 사운드가 고막을 자극했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총 17곡에 타이틀곡만 6개인 이 앨범은 이별 당시 습작했던 곡들과 최근의 싱글들을 묶어 정규로 발매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4년 만의 정규 치고는 음악 시장 내에서의 대중적 접근을 도모했다고 보긴 어렵다. 단번에 귀에 꽂히는 멜로디를 만들기보다, 길고 박자감이 덜한 곡들로 채운만큼 아티스트의 개인적인 작품에 더 가깝다. 커다란 흔적을 남길 만한 심적 사건을 겪었을 때, 누구나 새로이 잃고 얻게 되는 부분이 생기는 법. 이번이 그가 헤어짐으로 생긴 공백에 새로운 장르를 채웠음을 알리는 예고의 변곡점이 될지, 혹은 이별의 생채기를 치유하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컬의 장점이 두드러지는 장르에서 멀어진 듯한 아쉬움으로 인해, 알앤비 소울을 진득하게 소화하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는 없겠다.





"대체 불가능해지는 중"


2. 웬디 (WENDY) – [Cerulean Ve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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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애플 : 둥지를 옮긴 후 첫 발매인 [Cerulean Verge]는 사전적 의미로 "푸른빛의 경계"라는 뜻이다. 푸른빛 오렌지를 상징하던 웬디가, 이제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을 찾는 여정을 떠났다. 워딩은 달라졌으나 '착한 나는 죽었다'고 선언하던 2집처럼, '나를 찾겠다'는 메시지는 전작의 연장선인 셈이다. 장르적으로는 1집을 발라드로, 2집을 팝으로 채웠고 [Cerulean Verge]은 밴드 사운드 기반의 락으로 채우며 보컬리스트로서의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중이다. 파워 보컬이라는 수식어를 굳히려는 듯, 첫 트랙 첫 소절의 'Far away'는 저 멀리 달릴 준비되었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이는 앨범 전체의 인트로로 기능한다. 짧은 예열 이후의 흐름은 EXISTENTIAL CRISIS’까지 쭉 내달리며, 라이브 현장을 상상하게 한다. 그에 더해 ‘Hate²’가 고음만 내지른다는 느낌이 아니라, 세션과 어우러져 함께 연주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폭발적인 보컬을 풍성한 밴드 사운드가 든든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타이틀 ‘Sunkiss’가 수록곡을 제치고 타이틀이 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앨범 전반의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은 건 아니지만, 타이틀로 선정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냐는 이야기다. ‘Sunkiss’는 전작의 타이틀 ‘Wish You Hell’과 문법을 공유하는데,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하는 밴드 사운드의 곡이자, 시원한 보컬을 강조할 수 있는 곡이라는 것. 동시에 단점도 동일하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벌스에 비해 귀에 꽂히지 않는 코러스의 탑라인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혹자는 수록곡이 그만큼 퀄리티 있게 프로듀싱되었다고 말하겠지만, 그렇다면 타이틀은 더욱이 '활동할 만한' 곡이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1이 아닌 10을 보여줄 수 있는 아티스트라면, 20을 기대하게 되는 법이다. 퀄리티를 보장하는 수록곡을 뒤에 세운, 월등한 타이틀을 들려줄 차례다.





"게토를 떠난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3. 호미들 – [CHAPTER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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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 성공, 그다음은 무엇일까. 가난함과 삶의 불안을 이야기하며 소위 '게토 힙합' 서사로 포지셔닝해온 호미들에게도 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제는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며 머니 스웨거로서의 부와 여유를 보여주지만,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면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고난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내놓은 이번 앨범은, 그들의 단단한 결속력을 기반으로 음악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힌다.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이전보다 한층 뚜렷하게 나타나는 '하우스' 사운드다. 지난해 발매된 [YAINS] 앨범의 ‘노세노세’를 통해 부분적으로 하우스와 힙합을 접목했던 시도를 넘어, 처음과 끝에 하우스 트랙을 전략적으로 배치하여 호미들의 음악을 보다 트렌디한 이미지로 확장시킨다. 첫 번째 트랙인 ‘완공’으로는 강하게 때리는 킥 사운드와 가볍게 튀어 오르는 건반 소리로 리스너를 단숨에 끌어들이며, 마지막 트랙 ‘MUFFIN’으로 재치 있는 은유와 빈지노의 여유 있는 플로우로 재미를 더한다. 앨범 전체를 지배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리스너가 앨범을 들으며 처음 받은 인상을 끝까지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하우스의 신선함은 게토 소년들의 거친 이미지를 벗어나 현재의 여유롭고 부유한 위치와 어우러지며 그들의 세련된 음악적 캐릭터 확립에 일조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다만 Lean$moke, Kidstone과 함께하는 인하우스 프로덕션의 한계점이 보인다. ‘왜’와 ‘5,6,7’ 등 대부분의 트랙에서 Chin의 후렴으로 시작하여 CK와 Louie가 벌스를 맡는 고정된 구성으로 전개되어 반복으로 인한 지루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정해진 틀 안에서 타 아티스트와 호흡하려다 보니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결국 둘 모두에게 목적이 희미해진 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 음악을 시작했던 시기와 비교했을 때, 그들의 위치는 확연히 달라졌다. 더는 이전의 얘기를 반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 미래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확장의 의지를 보여준 이번 앨범을 발판 삼아, 다음 챕터에서는 더욱 선명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땅 위의 상처를 넘어 사랑의 우주 속으로"


4. Big Thief – [Double Infi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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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가든 : 모든 이에게는 개인적인 시련이 있고, 니체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 시련의 유일한 증인은 자신뿐이다. 보컬 '애드리앤 렌커'는 빅시프 창작관의 뿌리로서,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상처를 음악을 통해 증언해 왔다. 과거 앨범으로 되돌아 갈수록 그러한 개인적 서사를 포크록, 인디록 위주의 날 것에 가까운 사운드로 녹여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번 앨범에서는 사적인 상처를 넘어서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곡의 주제를 확장했다. 초기에는 렌커의 불우한 성장 배경이 뒷받침되어 상실과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심도 있게 고찰했다면, 이번 앨범은 먼발치서 인간사를 관조한다. 다시 말해, 삶과 고통의 불가분성에 대한 덧없음을 알고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음악으로써 체현했다.


이번 앨범에서는 악기 자체의 사운드도 밀도를 낮추고 공간감을 더했다. 기존의 포크 기반의 소리에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선에서 몽환적인 앰비언트성 텍스처를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6번 트랙 ‘No Fear’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가사와 베이스 선율이 반복되는 것이 특징인데, 두려울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말끔히 잊고 살아갈 수 있다며 주문을 거는 선구자의 노래를 듣는 것 같다. 나아가 7번 트랙 ‘Grandmother’에서는 미국의 앰비언트 음악가 라라지(Laraaji)와 협업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앨범의 후반부에서 초월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은 채 곡의 공간감을 더해주는 피처링은 마치 신비롭고 은밀한 조력자가 비밀리에 다녀간 것 같은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로써 덧없는 것들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을 때, 영원한 것이라 한다면 오로지 '희비의 반복'과 이를 이겨내고 연대하게 만드는 '사랑의 힘'만이 남을 뿐임을 시사한다. 다만 익숙하고 예측가능한 기승전결의 음악을 즐기는 청자라면 이번 앨범이 조금은 난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심오한 소재를 부각시키는 실험적인 리듬과 악기 구성 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립과 갈등이 고조되는 현시대 안에서 우리는 나만의 기쁨과 결핍과 풍요에 더더욱 사로잡혀 있을지 모를 일이므로. 사람보다 큰 사랑의 무한한 에너지를 녹여낸 사운드 속에서 잠시나마 유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안개 속을 헤매는 40분"


5. Blood Orange – [Essex 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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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애플 : 유년기는 성인 모두가 소유하는 가장 보편적인 시기다. 하인즈는 가장 보편적인 시기를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첼로를 중심으로 하는 스트링과 관악기가 그 방식을 가능케 한다. 전자 악기와 스트링의 조합이 안개 속에서 그의 의식 어딘가를 함께 헤매는 듯한 인상을 준다. ‘Thinking Clean’의 곡 전반에 깔린 스트링 위로, 피아노 솔로 연주가 어떤 송폼 없이 진행되는 방식은 안개 속을 헤매기 충분하다. 또한 '알맹이'가 없는 듯한, 허공을 부유하는 보컬 연출도 그 인상에 기여한다. 장르로는 트랩, 소울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있는 등 한 가지 장르로 묘사하는 게 까다롭다는 것도 '인상'을 주는 데 집중한 결과로 읽힌다. 곳곳의 불협과 불분명한 송폼도 앨범의 묘사를 흐리게 하지만, 동시에 앨범이 '상실'이라는 주제로 향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주제가 주제니만큼 전작 EP [Four Songs]보다 한층 차분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항구를 연상케 하는 인트로와 리듬을 잘게 쪼개다가도 스트링만 남겨 차분함을 남기는 다이내믹, 규모가 큰 피처링 등 완성도가 높은 ‘The Field’가 있음에도 결국 다시 찾게 되는 트랙이 ‘The last of England’라는 점이다. 트랙 전후의 테이프를 감은 듯한 나레이션, 미니멀한 피아노 보이싱과 브레이크 비트의 조합,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가사, 하이라이트에 등장하기보다는 곡 전반에 머무르는 스트링이 한데 어우러진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이러한 요소는, 장소와 시간과는 상관없이 고개를 드는 그리움과 닮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프레이즈 곳곳의 뮤트를 건 듯한 잠깐의 일시정지는 그리움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그 잠깐의 '플래시'와 같다. 즉 앨범이 전달하고자 하는 인상과 메시지를 한데 모아둔 트랙이 되는 셈이다. 음악에도 일종의 '세줄요약'이 있다면 ‘The Last of England’가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또한 ‘Mind Loaded’에서는 이름 있는 피처링 군단을 메인이 아닌 블렌딩 된 무리로 그려냄으로써 트랙 안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했다. '집단적' 상실의 메시지를 피처링을 통해서도 드러내고자 한 의도로 읽힌다. ‘The Field’와 마찬가지로, 하인즈는 ‘The Train’에도 담은 갈매기 울음소리로 항구 도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며 영국의 외곽이라는 낯선 공간을 이곳의 청자에게도 효과적으로 소개한다. 직접적인 표현이 청자로 하여금 앨범과의 심리적 거리를 줄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하인즈는 본인이 겪는 여러 가지를 앨범의 주제로 담아왔는데, [Essex Honey]는 최신의 앨범인 동시에 가장 과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스로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흑인인, 뉴욕에서 사는, 영국 출신의)를 앨범의 대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꾸려온 하인즈다. 이번 앨범이 유년기를 그려냈으니 이다음에는 죽음에 관해 그려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해 본다. 탄생과 가장 가까운 것이 죽음이므로.





"순수함이라는 이름의 양날의 검"


6. Elmiene – [Heat The Streets]

샐리 : Musiq Soulchild, D'Angelo 같은 2000년대 네오 소울 보컬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소울풀한 보컬과 감성이 돋보이는 앨범이다. 전반적으로 어쿠스틱한 악기 구성에 보컬을 얹은 단순한 구조로, 담백한 사운드 위에서 순수하게 보컬 역량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직 음악적 정체성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는 꽤나 도전적인 전략이지만, 전통적인 네오 소울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의 그루브와 성숙한 감정 표현으로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특히 ‘Miss Hot July’은 멜로디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듯한 리듬감을 선보이고, 캐롤 킹의 음악을 재해석한 ‘You've Got A Friend’에서는 기존의 감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새로운 감동을 전한다. 하지만 의미가 불명확한 Skit 트랙, 동일한 구조 안에서 비슷하게 흘러가는 트랙들이 앨범 전체 흐름을 방해하며, 진부하다는 감상으로 이어질 여지가 많다.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스타일이라는 강점을 지녔지만, 본인이 가진 보컬과 감정 표현 능력 이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사운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보컬' 역량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장르적 확장이나 개성 있는 사운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옛 감성을 재현하는 것에만 그칠 수 있다. 장르 색채가 짙은 R&B 사운드 위에서도 기죽지 않는 표현력으로 농익은 감성을 뿜어내고, 고전적인 곡을 재해석하는 능력까지 신예 아티스트인 그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음악적 차별화를 위한 다음 단계가 그에겐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 '레인가든', '샐리', '화인애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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