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sh, 신지훈, 3호선 버터플라이, Laufey 외
제트 : 초창기 크러쉬의 색이 겹쳐 들리는 감미롭고 칠한 R&B 앨범이다. 계산보다는 본능과 감각을 담아내었다고 밝혔듯이 본인이 잘하는 음악으로 채웠다. 그럼에도 희미하게 펼쳐지는 듯하면서도 단단한 보컬과 그 미묘한 결을 살리는 이펙팅 같은 계산적인 디테일은 여전한데, ‘2-5-1’ 후반부의 유려한 화성이나 ‘MAMMAMIA (feat. Tabber)’에서 ‘OVERLAP’으로 넘어가는 구간처럼 트랙 간의 이음새에서 느낄 수 있는 정교한 설계는 분명하게 눈에 띈다. 이처럼 섬세한 터치는 특유의 이지리스닝 멜로디와 어우러지며, 18분의 러닝타임이 마치 한 호흡처럼 매끄럽게 흘러가는 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말은 트랙들의 개성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다. 분명히 각 사운드 디테일은 다르지만, 그 '잘함'이 지나치게 좁은 영역과 방식으로 반복되어 6곡이 비슷하게 들린다. 퍼커시브 신스 위주의 사운드 디자인과 비슷한 속도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장르의 반복으로, 특유의 섬세함은 차별성을 잃어 오히려 집중력을 흩트리고 만다. 본인과 유사한 결의 수민, 로꼬, Tabber와 같은 피처링들의 반복도 자가복제 빌미의 요소로 작용하였는데, 특히 타이틀곡 ‘UP ALL NITE (feat. SUMIN)’은 수민의 존재감에 묻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결의 재치 있는 킥의 부재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때는 날카롭게 빛나던 송곳니였을지라도, 흡사한 음악이 쏟아지고 시간이 지난 지금에는 무디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광글 : 전쟁과 일상의 대비라는 주제는 이미 진부하다. 하지만 신지훈의 음악은 그 진부함을 억지로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한 숨소리와 정확하지 않은 음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진정성으로 전환한다. 담백한 피아노와 기타, 서글픈 목소리가 어우러진 ‘나무에 기대어’는 마치 한 사람의 호흡과 떨림이 담긴 녹음본을 듣는 것 같다. '평화'라는 단어도 식상하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단어가 가진 순수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하는 '아빠가 60만 원에 95년 산 아반떼를 사줬네'라는 앨범의 첫 가사는 이러한 순수함을 알리는 신호탄 같달까. 그 단순하면서도 맑은 전달력은 앨범을 단단히 붙드는 힘이 된다.
요즘 씬에서 이렇게 옛스러운 순수함을 정면으로 내세우는 아티스트는 거의 없다. '퓨어한' 음악은 많을지라도, 오히려 신지훈처럼 과거의 질감을 온전히 담아내는 방식은 흔치 않다. 그래서 이 앨범은 오히려 낯설 만큼 순박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한 켠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점점 이 음악은 꾸준히 회자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앨리 : 저 멀리 프랑스를 돌아온 보컬 남상아와 원년 멤버 기타리스트 성기완의 재합류로 3호선 버터플라이가 8년 만에 공백을 깼다. 그 때문인지 전자음이 돋보이던 전작과는 다르게 본작에서는 어쿠스틱 사운드가 부드럽게 귀에 감기며 전반적으로 차분해진 텐션을 느낄 수 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루즈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3번 트랙 ‘표선 무지개’ 속 Drill and Bass의 빠른 드럼이나 색소폰, 5번 트랙 ‘20년 전 오늘’의 플루트와 같이 예상치 못한 사운드들이 첨가되면서 듣는 재미가 더해지는 것이 반전일 테다. 이 같은 사운드 레이어들의 연결도 매우 자연스러워 리스너로 하여금 곡에 한껏 몰입하게 만든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또 다른 매력인 순수하고도 시적인 가사는 소리로 호소하는 보컬의 가창에 청각적 생기와 시각적 심상을 불어넣어준다. 'rainbow 곱하기 hundred days', '식탁 위에 차려진 자유가 꽤 먹음직해 보이네요'처럼 자체에서 재치가 느껴지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어디로 가든 달빛을 타고', '너는 내 손을 잡고 나는 니 눈을 바라봤어'와 같이 어떠한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가사는 공감각적 감상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완성도를 한 단계 더 높여준다.
3호선 버터플라이가 잦은 공백과 멤버 교체로 행보가 불확실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는 모던 락 밴드라는 정체성을 잘 유지할 것인가,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며 확장해 나갈 것인가, 이 두 가지가 그들의 음악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관건이 될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환희보라바깥]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앨범이라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실로 오랜만에 찾은 듣기 편안한 음악이었다.
광글 : '사랑'이라는 테마를 다시 꺼내 들면서도, 이제는 그것을 더 이상 순수하거나 낭만적인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1집에서 설레는 사랑, 2집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3집은 관계의 균열과 무너짐까지 서사의 중심에 둔다. 특히 마지막 트랙 ‘Sabotage’에서 들리는 불협화음은 내면의 혼란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더욱 큰 감정 스펙트럼을 나타내기 위해 '무너져 가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콘셉트를 선택함과 동시에 전작보다 훨씬 연극적인 연출을 의도한 점이 인상적이다.
스펙트럼의 확장은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오프닝 트랙 ‘Clockwork’, ‘Lover Girl’은 재즈와 보사노바로 익숙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아이슬란드어를 가사로 쓴 민속적인 멜로디의 ‘Forget-Me-Not’, 경쾌한 컨트리 특유의 어쿠스틱 스트럼이 돋보이는 ‘Clean Air’까지 듣다 보면 어느샌가 새로운 손님인 컨트리·민요의 매력까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A Cautionary Tale’은 고조되는 오케스트라와 극적인 편곡 덕분에 마치 라나 델 레이가 떠오르며, 여전히 복고적인 색채를 품고 있으면서도 한 발 더 현대적으로 다가오려는 그녀의 고심이 느껴진다. 덕분에 Laufey는 단순히 추억을 복제하는 아티스트에 그치지 않는다. 레트로는 누구나 소환할 수 있지만, 이를 자신의 서사와 섞어 포장할 수 있는 건 드물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브랜딩이 지금 시장에서 대체할 수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다만 이 클래식한 기조가 앨범의 강점이자 한계로 동시에 작용한다. 그녀의 지문처럼 자리 잡은 일관된 목소리 톤은 새로운 시도들보다 더 강한 캐릭터를 발휘한다. 이는 모든 음악에 통일감을 주는 동시에 반복적인 인상이 들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든달까. 새로움은 있었지만, 혁신이라 부르기에는 기존의 보컬 자체가 너무 압도적인 존재감이 들었다. 결국 A Matter of Time은 잘 만든 클래식한 가구 같다. 고급스럽고 단단하지만, 방 안의 공기를 흔들 만큼 새롭지는 않은 느낌이다. 감정의 깊이와 장르적 확장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과감하게 스펙트럼을 흔드는 순간들이 있었다면 앨범의 드라마는 훨씬 선명해졌을 것이다.
제트 : 이 앨범의 중심축은 무엇보다 메시지와 사운드의 결합이다. 특히 ‘9 2 5’에서는 지쳐가는 노동의 삶 속 양면적인 감정을, ‘Jojo (feat. Tony Bontana)’에서는 어떠한 고난에도 남는 건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그리고 ‘BABY BABY’에서는 팔레스타인 폭격 같은 정치적 비극을 언급한다. 이처럼 무거운 현실을 역으로 경쾌하게 풀어낸 구간은, 따뜻하고 묵직한 90년대 사운드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여 삶, 사랑, 정치라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보편적인 주제를 교차시킨다.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낸 것처럼, 구성 면에서도 다채로움은 이어진다. 네오소울의 그루비함과 풍성하고 리드미컬한 사운드를 통해 90년대 R&B 향을 진하게 불러오는 전반부와 인털루드를 지나 경쾌한 퍼커션과 기타 리프로 활기차게 전환되는 중반부는 앨범 전반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후반부에서는 R&B와 인디팝의 경계 위를 넘나드는데, 또 다른 변주를 통해 마지막까지 새로운 색채를 더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또한 다양한 사운드 아래 묘하게 어긋나는 듯 맞아떨어지는 비트는 집중하는 재미를 높이고, 12곡이라는 볼륨과 여전히 정교한 사운드는 견고한 전개력을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앨범은 곱씹게 하는 메시지와 듣는 재미라는 음악의 핵심 가치를 충실히 상기시켰다. 두 요소를 고루 충족하며 설득력 있는 울림을 전달했고, 음악 그 자체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과정과 즐거움을 증명했다. 수십 년간 쌓여온 장르와 사운드 사이, 더 이상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기존의 결을 계승하고 변형하는 흐름 속에서 [The Passionate Ones]는 90년대 R&B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현대 사회와 정치적 현실을 빼곡히 그려내고, 디지털 질감을 적절히 섞어내어 과거와 현재를 밀착시켰다. 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방식의 철저한 이행 아래 두 시대의 정서적 공감대와 사운드를 동시에 구현해 낸, 동시대 R&B가 나아갈 수 있는 모범적인 길을 보인 앨범이 아닐까.
앨리 : 브라질 팝 뮤지션이자 세계적 드랙퀸 가수인 파블로 비타르와 케이팝 걸그룹 엔믹스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며 또 한 번 글로벌 음악의 바람이 섞였다. 808 킥 드럼과 신스 베이스가 묵직한 브라질 발리 펑크 장르로, 남미향 진하게 풍기는 리듬과 속도감 있는 비트가 댄서블하여 라틴팝에 점차 익숙해져 온 케이팝 리스너들도 귀를 기울여 볼 만한 곡이다.
파블로의 정체성과도 같은 하이 피치 보컬과 전자 사운드에 엔믹스 랩 라인의 랩핑과 보컬 라인의 하모니가 더해졌는데, 퀴어의 아이콘으로서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시도로 협업을 진행한 것 치고는 엔믹스의 매력은 상대적으로 희미한 느낌이다. 파워풀함을 보여줄 파트적 여유가 없는 랩핑, 전자음에 가려진 보컬 라인의 음색, '나란히'가 아닌 '뒤에서' 보여주는 안무 등, 파블로의 음악적 매력을 강화할 포텐을 가진 엔믹스만의 K-매력이 충분히 융합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장르적 기반을 가져간 채 고음 보컬을 엔믹스의 보컬 라인과 함께 가창하거나, 브라질리안 리듬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넓은 대형의 군무 코레오를 선보였다면 양측의 매력이 더욱 극대화되지 않았을까. 더하기(+)가 아닌 곱하기(x), 얹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뒤섞임으로 글로벌 리스너를 놀라게 할 콜라보레이션을 기다릴 뿐이다.
※ '광글', '제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