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릿 (ILLIT) – ‘NOT CUTE ANYMORE’
걸그룹의 성공 여부는 오랫동안 '대중성'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여전히 사람들은 국내 음원 차트의 순위를 통해 이들의 인기를 가늠하곤 한다. 이는 케이팝 산업에서 여성 팬들이 주요한 소비 주체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케이팝 산업에서는 여성 팬의 구매력과 참여도가 남성 팬보다 더 높다는 것이 여러 차례 검증되었다. 걸그룹은 남성 팬덤 위주로 보이그룹에 비해 음반 판매량과 콘서트 동원력에서 한계를 보였고, 자연스럽게 음원, 광고, 방송 등 대중적 인지도를 활용한 활동에 집중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펼쳐왔다.
그러나 해외 시장이 열리면서 월드 투어를 돌며 음반 초동 100만 장을 파는 걸그룹들이 나타났고, 국내 시장을 넘어 다양한 타겟을 대상으로 전략을 펼칠 만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달라진 부분은, 이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여성 팬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은 기획 방향에도 영향을 주었고, 흔히 말하는 걸크러쉬 콘셉트로 국내외 여성 팬들의 동경과 지지를 이끄는 걸그룹들이 점차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걸그룹을 둘러싼 선택지는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고려할 대상이 많아진 만큼, 그들을 동시에 챙기기란 쉽지 않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전략은 어느 쪽에도 강하게 닿지 못하기 마련이고, 팀의 색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요즘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일릿은 비교적 색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아일릿은 귀여운 동안의 외모를 가진 멤버 ‘원희’를 주축으로, 밝은 분위기와 가벼운 리듬이 돋보이는 대중적인 곡을 선보이고 있는 팀이다. 동시에 신디사이저와 칩튠 이펙트 등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몽환적인 감성이 특징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 투어와 음반에서 괜찮은 성적을 내는 걸그룹들은 해외 팬덤이 기반이 된다. 이들이 우선적으로 노리고 있는 시장은 일본이다. 일본인 멤버 2명이 속해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성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강렬한 콘셉트를 내세우며 여성 팬덤을 확보한 ‘HANA’ 같은 그룹이 등장하고 있지만, 대중 전반적으로는 밝고 귀여운 콘셉트가 걸그룹의 기본 문법으로 자리 잡혀 있다. 그러나 일본 진출에 성공한 케이팝 그룹의 경우 대부분 걸크러쉬 콘셉트를 선보이는 팀으로, 일본 활동을 할 땐 일본에서 통할 법한 콘셉트의 곡을 별도로 준비하는 그룹이 대부분인 상황이었다. 아일릿은 일본 대중에게 조금 더 친숙한 콘셉트를 통해 그들과의 차별화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작년에 이어 ‘홍백가합전’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며 일본 시장에서 비교적 빠르게 입지를 다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출연하는 것 자체가 상징적으로 여겨지는 시상식이고, 니쥬 같은 현지화 그룹을 제외하면 케이팝 그룹 중 2회 이상 참여한 팀은 보아, 동방신기, 트와이스, 르세라핌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어쩌면 아일릿은 트와이스와 가장 비슷한 형태로 일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팝 그룹이 트와이스이기도 하다. 밝은 음악과 쉬운 포인트 안무가 특징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트와이스의 데뷔 당시에는 다국적 걸그룹이 예외적인 사례였고, 아일릿은 일본 시장만을 고려한 선택은 아니다. 이들은 동시에 글로벌 진출을 위해 틱톡, 즉 숏폼 바이럴에 최적화된 음악을 제작하는 전략을 택했다. 당시 다른 그룹들은 이지리스닝 팝과 영어 가사로 이루어진 곡을 발매한 후 이를 Sped Up 버전으로 재발매하는 방식으로 틱톡을 겨냥했으나, 아일릿은 사운드 면에서도 구성 면에서도 '틱톡 감성'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였다. 데뷔곡 ‘Magnetic’의 성공에도 틱톡에서 흥행한 장르인 ‘플럭앤비(Pluggnb)’를 발 빠르게 선보였던 부분이 유효하게 작용하였다. 아일릿의 음악에서 자주 쓰이는 의성어를 반복하는 중독성 있는 훅 역시 숏폼처럼 짧은 순간 내에 곡을 각인시켜야 하는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아일릿은 데뷔곡 ‘Magnetic’을 통해 멜론 연간 차트 8위를 차지하였고, 케이팝 데뷔곡 최초 및 최단기로 빌보드 핫100 차트에 진입하는 등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적인 영향력을 입증했다.
콘서트 예매 통계에 따르면, 아일릿 역시 여성 팬층이 주를 이루는 그룹으로 그 비율이 무려 77.9%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함께 5세대로 분류되는 걸그룹들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기도 하다.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이전의 걸그룹들은 여성에게 동경의 감정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소구해 왔고, 아일릿은 대중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인식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아일릿은 어떻게 여성 팬덤을 확보했을까?
아일릿 관련 콘텐츠의 댓글에는 '서늘함'이라는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팬들에게 아일릿이 이러한 정체성을 지닌 그룹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인상의 출발점에는 ‘Magnetic’과 ‘Cherish’의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있다. '리미널 스페이스'란 ‘백룸’이라는 인터넷 밈에서 등장한 에스테틱 개념으로, 현실과 다른 위화감이 느껴지는 미지의 공간을 뜻한다. 아일릿의 뮤직비디오에는 어두컴컴하고 사람이 없는 기묘한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콘셉트 포토에서도 꾸준히 몽환적이고 서늘한 색감을 활용하고 있다. 아일릿이 보여주고자 하는 소녀는 귀엽지만 어딘가 서늘하고 알 수 없는 모습을 가진 복합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특별히 여성 팬덤을 타겟으로 설정했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서 이들의 방향성이 조금 더 드러나는 것이 '마법소녀' 콘셉트이다. 마법소녀물은 여성들에게 익숙하면서도 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콘텐츠다. 그리고 아일릿은 저번 앨범을 통해 '마법이란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라며 마법소녀를 새롭게 재해석한 메시지를 전했다. 현실 속 소녀가 마법소녀가 된 웹툰 ‘썸머문’의 공개를 통해 마법소녀가 1회성 콘셉트가 아닌 이들의 주력 콘셉트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표적인 마법소녀물들은 나잇대가 어린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일릿처럼 귀여운 콘셉트의 그룹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콘셉트라는 생각도 든다.
이들은 걸크러쉬 콘셉트로 동경의 감정을 끌어내는 그룹들과 다르다. 유사 연애의 감정 혹은 친근함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의 청순 큐티 콘셉트 걸그룹들과도 궤를 달리한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흥미로운 콘텐츠로써 그들의 취향을 공략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샵페어리’, ‘리틀미미’ 등 여성 팬덤이 선호하는 브랜드와의 협업 역시 그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소비를 유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아일릿은 대중적 인지도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 팬층을 중심으로 한 안정적인 지지 기반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아일릿은 처음부터 우선순위와 목표를 뚜렷하게 설정하고, 이를 구현하는 데 최적화된 콘셉트를 선보였다. 그 결과 일관된 브랜딩을 유지하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물론 벌써 이들의 전략이 성공했는지를 판단하기엔 이르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싱글 ‘NOT CUTE ANYMORE’는 아일릿이 다음 단계를 어떤 방식으로 헤쳐 나갈지를 제시한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아일릿은 ‘Magnetic’, ‘빌려온 고양이’, ‘Tick-Tack’ 등 단기간에 여러 곡을 흥행시키며 자신들의 음악색을 대중에게 빠르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같은 공식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색을 어떻게 오랫동안 지켜 나가면서 변주하는지가 이들의 주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아일릿은 속도를 늦추는 쪽을 택했다. ‘NOT CUTE ANYMORE’은 아이돌 타이틀곡답지 않게 느릿한 리듬과 심심한 구성이 특징인 곡이다. 물론 이전에도 ‘Magnetic’, ‘Cherish’, ‘빌려온 고양이’에 걸쳐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지만, 직전에 나온 ‘빌려온 고양이’가 맥시멀한 사운드가 돋보이는 곡이었기에 변화가 더 두드러졌다. 가장 큰 특징이었던 의성어가 반복되는 훅을 제외하고, 부드럽고 몽환적인 감성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기존 음악색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한 시도로, 7년이라는 장기적인 플랜을 더 중시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음악 외적으로도 변화를 시도했는데, 이들은 ‘NOT CUTE ANYMORE’라는 제목으로 귀엽지 않고 싶다는 의지를 전면에 드러냈다. 직관적인 만큼 강한 전달력을 지닌 이 주제는 '귀엽다'라는 인식을 오히려 더 강화하기도 한다. 정말 변화를 원했다면 오히려 불리한 주제다. 그러나 '귀엽지 않고 싶은데 귀여운 것'이 콘셉트라는 점이 유쾌하다. 기존 색과 다른 비주얼 콘셉트를 마음껏 선보이고 음악적인 변화를 보여주면서도 귀여운 이미지를 유지해냈다. 함께 수록된 ‘NOT ME’의 가사로는 '귀여운 모습이 다가 아니며 누구도 나를 규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것은 귀여운 콘셉트를 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것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아일릿은 귀여운 콘셉트를 내려놓지 않고, 그것을 기반으로 확장 가능한 방향성을 모색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갑작스런 변화에 진입 순위가 크게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댓글을 살펴보면 팬덤 내부에선 크게 반발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변화 속에서도 팬들이 원하는 정체성이 유지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대중이 아일릿의 음악을 듣는 이유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몽환적이고 서늘한 감성, 귀엽지만 독특한 모습이 이들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데뷔부터 이번에 나온 싱글에 이르기까지, 아일릿이 시도해 온 전략들은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자신들에게 맞는 방향을 선택하는 팀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전략적인 선택이었을지라도, 그것을 자신들의 개성으로 승화시켜 내는 설득력과 소화력이 이들의 강점이다.
아일릿은 데뷔곡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둔 팀이다. 유리한 부분도 많겠지만, 이는 이후의 활동을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아일릿은 이전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며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어가고 있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팀명처럼,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기대되는 팀이다.
by. 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