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HYPEN (엔하이픈) - [THE SIN : VANISH]
마블 코믹스 버금가는 퀄리티의 흑백 애니메이션과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CG 연출. 거대한 중세 유럽풍 건물들, 검은 동굴과 사막 등 엄청난 규모의 로케이션. 지난해 말부터 엔하이픈(ENHYPEN)이 공개한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트레일러 비디오 4편과 '다크문' 세계관을 내레이션과 비주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3편의 인터루드 비디오는 그야말로 역대급 스케일이었다. 이 외에도 뱀파이어 뉴스를 다루는 의문의 웹사이트, 대한적십자사와의 헌혈 캠페인, 세계관 웹툰과 게임까지, 정교한 세계관을 다각도로 활용하여 화려한 포문을 열었다.
그렇지만 너무 화려했던 탓일까? 베일을 벗고 발매의 순간, 평가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스토리 앨범'이라는 형식까지 빌려와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세계관 그룹으로서 케이팝 팬층을 저격할 치트키를 쓴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팬덤에게 조차 외면당하는 씁쓸한 결과를 맞았다. 엔하이픈 나름의 시그니처였던 내레이션 트랙은 이번 앨범 최악의 원흉이 됐고, 2분 남짓의 타이틀곡은 여러 혹평을 종식시킬 만큼의 힘을 쓰지 못했다. 지금 대규모 '티저 사기극'이 벌어진 것 같다고 감히 말해본다.
이번 앨범은 한 마디로 '컨셉'이 전부였다. 엔하이픈의 미니 7집 [THE SIN : VANISH]는 죄악을 모티브로 한 새로운 시리즈 'THE SIN'의 첫 챕터로, 사랑을 위해 도피하는 뱀파이어 연인과 그 이면의 죄책감을 주제로 세계관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새로운 챕터의 세계관을 다룬 트레일러 비디오를 통해 프로모션의 첫 단부터 강렬한 임팩트를 던졌고, Travis Scott, Sabrina Carpenter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작업해 온 포토그래퍼 Jack Bridgland가 컨셉 포토를 촬영하여 특유의 거칠고 어두운 에너지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대망의 앨범 트랙은 이러한 컨셉 그 자체가 극대화된 구성이었다. 거의 트랙의 절반이 내레이션 트랙으로 구성되었는데, 그간 앨범의 처음과 끝에 배치되던 내레이션 트랙을 '스토리 앨범'이라는 형식으로 확장하며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칭 '몰입형 컨셉 앨범'은 납득받지 못했다. 덜어냄이 미학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엔하이픈의 '컨셉추얼함'은 과연 어떤 함정을 간과했던 것일까.
우선 내레이션 트랙의 스토리 구조가 지나치게 일차원적이고 직관적인 수준에 머문다는 점이다. 노래와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내레이션 트랙은 '금기를 깬 뱀파이어 연인의 도피'라는 사건을 다루는데, 트랙은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이라는 순서대로 정직하게 전개되는 식이다. 내레이션은 도피 사건이라는 주제에 맞게 사건을 추적하는 '탐사보도'의 컨셉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모든 내용이 평면적인 서술 정도로 그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연출 방식이다. 동일하게 내레이션 트랙을 활용해 가상의 세계관을 표현한 The Weekend의 [Dawn FM] 앨범의 경우, 첫 번째 트랙 'Dawn FM' 마지막 부분의 라디오 방송 보이스 이후 다음 트랙 'Gasoline'이 건조하고 밀도 높은 신스 사운드로 매끄럽게 시작하고, 'A Tale By Quincy'와 'Out of Time' 트랙에서는 스킷과 노래의 트랙 사운드가 마치 한 곡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엔하이픈은 배우 '박정민'의 목소리를 빌려오기까지 했으나, 담백한 톤으로 읊는 음성을 배경 음악 위에 그대로 올려놓은 수준의 단순한 구성으로 감정선과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인상이 크다. 특히 '목격자' 라는 트랙은 여러 목격자의 증언을 그대로 나열하며, 컨셉에 과도하게 매몰된 나머지 음악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뜬금없는 트랙이다. 게다가, 길게는 2분도 넘어가는 이러한 기계적인 내레이션 트랙은 노래와 번갈아 등장하는 탓에 트랙 간 긴장감과 몰입을 떨어뜨리고 후반부에 가서는 노래마저도 루즈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맥 커터'로 작용한다. 탄탄한 세계관 하나만으로 몰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얄팍한 발상은 컨셉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큰 그림을 놓친 '탁상공론'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뮤직비디오는 더욱 심각하다. 제니, Dua Lipa 등의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한 BRTHR 감독이 메가폰을 쥔 것이 무색하게 일단 스케일부터 트레일러 비디오와 비교되는 아쉬운 퀄리티다. 트레일러 비디오에서 뱀파이어 서사를 스케일 있고 매끈한 연출로 잡아낸 반면, 타이틀곡 'Knife' 뮤직비디오는 그 첫 시작부터 매우 뻔한 전개다. 뱀파이어 출몰 소식을 보도하는 뉴스 속보의 도입부는 흔한 뱀파이어, 판타지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일차원적인 스토리 라인이며, 핵심 소품으로 제시되는 칼(knife)은 웅장하고 무게감 있는 사운드가 무색하게 과도 수준의 작은 크기로, 전반적으로 그간의 프로모션을 통해 쌓아 온 긴장감을 아쉽게 만드는 소극적인 하이라이트였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결과가 판단 미스가 아니라 앨범 판매량을 고려한 '예견된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이번 앨범으로 '빌보드 차트 200' 2위에 오르는 성과를 분명히 이뤄 내긴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개별 트랙의 완성도보다는 앨범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여 스트리밍을 유도하고, 세계관과 캐릭터에 과몰입하도록 설계하여 앨범 단위의 소비를 목표한 전략으로 보인다. 더욱이 멤버별 내레이션이 담긴 7종의 리믹스 버전 앨범을 추가로 발매한 점을 미루어 보면, 글로벌 차트 성과를 위한 의도된 '기획'으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성적을 위한 계산된 선택이라기엔 정작 중심이 되어야 할 타이틀곡이 가장 외면받고 있다. 컨셉은 분명 강력했으나, '몰입형 앨범'이라는 기획이 스스로 함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사실 이번 앨범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타이틀곡 'Knife'를 비롯해 수록곡 'Big Girls Don't Cry'의 공통적인 문제는 지나치게 단순한 챈트 중심의 후렴 구성이 곡의 무게감을 날려버린다는 점이다. 'Knife'는 후렴구에서 "It's a knife"라고 외치는 구조가 반복되는 식인데, 단순 반복 후렴구를 중심으로 벌스는 큰 특징 없이 적당히 오토튠이 가미된 멜로디가 무난하게 전개되는 식이다. 날 선 신스 사운드와 다크한 분위기가 베이스로 깔려있지만, 'knife'라는 단어를 그저 단조롭게 내뱉는 식의 후렴구는 가볍고 유치하게만 느껴진다.
수록곡 'Big Girls Don't Cry' 역시 미니멀한 비트 위에 단순한 반복을 얹는 구성인데, '거대한 소녀들은 울지 않는다'라는 특이한 구절 하나로 간신히 포인트를 만들 뿐, 곡 전체는 분위기만 맹숭맹숭하게 맴도는 인상이다. 그 외 'No Way Back' 트랙에서는 웅얼거리는 듯한 보컬과 몽환적인 바이브만이 희마하게 남는 정도라 곡으로서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고, 내레이션 트랙 사이 쉬어가는 구간 정도로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음악이 세계관을 이끄는 게 아니라, 컨셉에 음악이 대충 분위기만 맞추고 있는 인상이다.
무엇보다 이해가 어려웠던 점은 엔하이픈이 왜 지금, 왜 이러한 작법의 '트랩'을 선택해야 했냐는 부분이다. 사실 'Knife'는 최근 케이팝 씬에서 유행하고 있는 트랩 기반의 힙합 음악 스타일로, 코르티스의 'FaSHioN'을 대표로, 세븐틴의 'Water', 라이즈의 'Fame' 등 곡의 메인이 되는 챈트를 단순하게 툭툭 내뱉는 후렴구 구성이 공통된 특징이다. 사실 이러한 트랩, 더 나아가 레이지 장르의 본질은 Travis Scott, Playboi Carti와 같은 음악처럼 디스토션이 강하게 걸린 신스와 오토튠 보이스, 들끓는 에너지를 통해 어딘가 통제되지 않는 날 것의 정서가 핵심이다. 이러한 트랩 류의 힙합을 구현한 여러 케이팝 그룹 가운데 코르티스의 'FaSHioN'이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다. 젠지 세대의 자유로운 에너지가 느껴지는 플로우와 일상적인 언어로 재치 있게 풀어내며, 그 덕에 'Fashion'이라는 단순한 챈트는 멋있고 캐치하게 들린다. 반면, 엔하이픈의 'Knife'는 가사부터 특별할 것 없이 너무 일차원적이라 단순하게 반복되는 신스 사운드가 그저 단조롭게만 느껴진다. 그 결과, 사운드는 웅장한데 메시지는 가볍고, 컨셉은 거대한데 별다른 인상이 느껴지지 않아 괴리감만 크게 느껴진다. 이러한 선택은 유행에 적절히 편승하려는 계산으로 보이지만, 해당 장르가 지닌 정서에 대한 이해 없이 형식만 차용한 벤치마킹에 그쳤다.
게다가, 엔하이픈은 'No Doubt'를 비롯한 기존 음악에서 부드러운 보컬 음색이 두드러지는 섬세하고 로맨틱한 무드를 통해, 오히려 힘을 빼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음악에서 강점을 드러내온 그룹이다. 물론 전작 'Bad Desire'에서 한층 다크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새로운 챕터의 엔하이픈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고민의 흔적이 보였고, 이러한 전환을 강렬하고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트랩 계열의 힙합 음악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번 타이틀곡은 엔하이픈이 그간 잘해오던 장점을 스스로 지워버리고 단점을 부각하는 방향뿐이었다. 그 지점에서 이번 시도는 과감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아쉬움만 남긴 판단 착오에 가깝다.
물론 이는 비단 엔하이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발매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프로모션 웹사이트와 캠페인, 각종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패션 화보에 버금가는 스케일의 컨셉 포토까지. 이러한 컴백 공식은 어느새 케이팝 씬에서 암묵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았고 콘텐츠의 양과 규모는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그 중심에 놓여야 할 음악(특히 타이틀곡)의 역할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이제 앨범의 정체성은 수록곡과 서사, 그리고 고도화된 프로모션을 통해 만들어지며, 타이틀곡으로는 '바이럴'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이제 음악으로 승부하겠다는 말은 오히려 위험한 도박처럼 보인다.
물론 오로지 음악으로만 승부하겠다는 전략은 대책 없는 위험한 도박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전에서 결국 관건은 브랜딩이며, 이는 결코 화려한 프로모션과 무진장 많은 트랙의 수로 난사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프로모션이 아무리 정교하고 참신해도 '좋은' 음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리스너들에게 앨범과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는 남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엔하이픈의 미니 7집 'THE SIN : VANISH'은 프로모션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로서 어떤 음악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빠드린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관과 컨셉은 음악을 보조하는 장치일 뿐, 감정과 서사가 전면에 드러나야 하는 영역은 결국 음악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더 이상 뱀파이어 세계관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도 말해주고 있다. 차라리 음악을 중심으로 컨셉은 뒤로 은은하게 감췄다면 오히려 더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컨셉 말고 '음악 그 자체'로 엔하이픈을 보여줄 차례다.
by. 샤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