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iiKiii, 기리보이/헤이즈, Cavetown, fakemink
태휘 : '무공해'라는 감각적인 콘셉트로 데뷔 초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키키는 1집 [UNCUT GEM]이 '중소돌'이라는 한계를 비웃듯 세련된 음악과 신박한 기획으로 케이팝 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면, 이번 2집 EP [Delulu Pack]은 그들이 고수해 온 Y2k의 미학을 하우스 장르로 확장하여 한층 영리한 승부수를 던진다. 첫 곡 ‘Delulu’는 드라이한 하우스 리듬 위로 짧은 신스들이 향연을 이루는 개러지 하우스 트랙으로, 사이사이 터지는 Gurgle 이펙트가 키키 특유의 청량함을 극대화한다. 또, 리얼 카우벨과 레트로한 tr-808 카우벨 소리를 섞어 80년대 질감을 느끼게 한 부분은 이들의 콘셉트를 극명하게 드러낸 부분이다. 연이어 타이틀 ‘404 (New era)’ 역시 미니멀한 Four on the floor 하우스 리듬 위로 세련된 고급미를 풍긴다. '몸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음악'이라는 장르적 본질에 맞게 업스윕(Upsweep) 이펙트와 Uk 게러지가 예열을 담당하는 빌드업 장치로 기능한다. 이후 코러스에서 짧게 끊어지는 플럭 신스들은 저절로 리듬에 올라타도록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도입부에서 '키야'의 묵직한 보컬 톤이 이목을 끄는 마성을 발휘하고, 이후 멤버들의 다양한 톤을 매력적으로 교차시키며 상쾌함을 완성해 낸다.
사실상 이제 Y2k 콘셉트는 대중에게 그리 신선한 부분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소비되는 이유는 기술적 과잉이 불러온 피로감을 정확히 공략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AI 콘텐츠 속에서 대중은 오히려 진정성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키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골반 바지와 벨벳 츄리닝, 뉴에라 같은 레트로 아이템을 적극 활용하는 한편, 앨범 프로모션에서 하두리, 프루티거 메트로 스타일을 이들의 감각으로 재연출해 '힙한 레트로'를 선사했다. 중요한 것은 이 비주얼 요소들이 하우스 장르와도 유기적으로 맞물린다는 점이다. 하우스 장르 특유의 고전적인 리듬 반복이 자아내는 빈티지한 무드는 비주얼과 공통점인 '레트로'라는 키워드로 묶이며 강력한 시너지를 발현한다. 결국 이번 2집 EP는 음악과 비주얼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정렬시킨 기획력이 돋보이는 결과물이며, 보는 재미와 듣는 재미 두 개를 동시에 챙긴 일석이조 앨범이다.
제트 : 기리보이와 헤이즈, 나란히 두었을 때 너무나도 익숙한 두 이름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조합이다. [안 될 사람]도 그렇다. 빈티지한 기타와 건반을 중심으로 한 구성과 특유의 '헤이즈 감성'이 짙게 묻은 R&B 전개는 이들이 선택해 온 확실한 공식이었다. 특히 타이틀곡 ‘안 될 사람’은 이 공식이 그대로 구현되었는데, 간결한 구조 위 서정적인 보컬과 누구나 공감할 법한 세부적인 서사는 큰 이해가 필요 없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그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쨍한 글라이드 신스도 짧고 단순하게 반복되며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구간을 일차원적으로 짚어낸 듯하다. 이어지는 흐름 역시 낯설지 않다. 느릿하게 깔리는 피아노와 스르르 스며드는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링, 가벼운 하이햇의 ‘멈춰버린 계절’ 속 독백에 가까운 헤이즈의 보컬은 쓸쓸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이는 곧 풍성하게 쌓은 사운드 레이어의 ‘겹지인’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렇게 단계적으로 그려내고자 한 울렁이는 감정의 곡선 또한 단순한 이별 서사 구조 이상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결국 이 앨범은 지난 헤이즈 솔로 앨범이 남긴 자가복제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 위에 있다. 4년 만의 합작이라는 점과 2000년대 싸이월드 감성 및 헤이즈의 대표곡들이 떠오르는 사운드는 분명 반가움을 남긴다. 그러나 이는 다섯 번째 협업임에도 추억 환기 외 색다른 기획 의도가 보이지 않는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하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새로운 사운드의 시도가 어려웠다면, 반 고정되어 있던 역할 구도에 변주를 주는 선택지는 어땠을까. 주로 담백한 싱잉과 랩을 오가던 기리보이와 애절한 보컬을 얹어내던 헤이즈에서 벗어나, 서로의 영역을 섞어보는 변형은 최소한의 신선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 될 사람]은 안전한 치트키 속 일관적인 안주에 가까웠고, 이 조합이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증명하기에는 고민이 얕았다.
태휘 : 영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Cavetown은 2012년 방구석 아티스트로 시작해 [Lemon Boy]와 [Animal Kingdom]의 바이럴을 통해 베드룸 팝의 아이콘으로 성장했고, 이후 대형 레이블에서 메이저 아티스트로서 안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 [Running With Scissors]의 행보는 결이 다르다. 자본의 거대한 울타리를 걷어차고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Future Music Group'으로 이전하며 조금 더 창작의 자율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 과정 속 가장 흥미로운 변화는 줄곧 고수해 온 독자적인 작업의 틀을 깨고 외부 프로듀서들과의 협업을 과감히 수용했다는 점이다. 기존 베드룸 팝, 인디 팝의 안전한 성벽을 부수고 낮은 채도의 인디 락과 얼터 팝으로 그 영토를 확장한 이 선택은, 변화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번 앨범은 Cavetown의 전매특허 사운드를 고수하면서도, 그 질감을 날카롭게 비튼 시도가 보인다. ‘Baby Spoon’은 인디트로니카 장르로 어쿠스틱 기타와 글리치한 사운드가 얌전하게 사운드를 드러내고, 코러스에서 겹겹이 쌓인 백킹 보컬과 묵직한 베이스는 마치 전작 [worm food]의 ‘worm food’와 같은 부드러운 무드를 자아낸다. 반면 ‘NPC’는 Dominic Fike, 재현, 츄 등과 협업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감각을 보여준 프로듀서 Ryan Raines가 참여하여 새로운 얼트 팝의 시도가 돋보이는 트랙이다. 강렬한 톤의 기타와 리얼 드럼이 시원하게 이끌어가고, 이후 빌드업을 거쳐 코러스에서 파워풀하게 몰아치는 구성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브릿지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불협화음은 Cavetown이 느끼는 불안정함을 극대화하듯 의도적으로 배치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연이어 ‘Straight Through My Head (DO IT!!!)’은 인디트로니카와 트랙으로 특유의 간지러운 보컬로 초반부를 이어가다, 오버디스토션된 일렉 기타를 투입해 사운드의 대비감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부분은 서늘한 기운을 연상케 하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앨범의 총 13개 트랙 중 8개 트랙이 락 장르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작 [worm food]가 단 한 곡, ‘1994’에서 어쿠스틱한 사운드 위 정돈된 메이저 문법에 그쳤다면, 대표적으로 이번 ‘Cryptid’나 ‘Tarmac’에서 보여준 오버디스토션 이펙트, 헤비메탈처럼 내지르는 고음, 마이너한 코드 진행 등을 통해 자신을 가두던 '베드룸 팝 아이콘'의 프레임을 부수고 더 대담해지길 원하는 태도로 읽힌다. 이런 행보가 낯서냐고? 아니, 이 야망 가득한 기세와 사운드에 압도적으로 홀릴 뿐이다. 익숙한 Cavetown을 접어두고 거친 소리를 선택한 이번 앨범은 변화가 곧 진화임을 증명하며, 날카롭게 성장한 그의 새로운 모습을 인정하게 만드는 앨범이다.
제트 : 근 몇 년간 영국을 주축으로 눈에 띄게 성장하는 힙합 장르가 있다. 바로 불안정하고 공격적인 신스나 왜곡된 베이스, 강하게 튀는 리듬이 돋보이는 'Jerk(이하 절크)' 신이다. 그 사이에서 fakemink(이하 페이크밍크)는 작년에 발표한 ‘Easter Pink’를 통해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아티스트였다. 페이크밍크는 절크 음악의 기본적인 틀과 에너지 위에 아날로그하면서도 강한 비트, 로봇 같은 톤의 일렉트로 크래시의 질감을 덧입힌다. 이뿐만 아니라 몽롱한 클라우드 랩의 느낌을 빌리면서도, 특유의 무미건조한 래핑과 거칠고 몽환적이지만 과하게 요동치지 않는 전개로 ‘은근하게 정돈된 듯한 혼란스러움’이라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구축해 왔다.
2년 만에 앨범 단위로 발표된 [The Boy who cried Terrified .]는 이러한 방향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트랙 ‘Blow The Speaker .’는 어딘가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희미하게 퍼지는 신스와 미묘하게 피치업된 보컬을 통해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어지는 ‘Dumb .’는 로파이하면서 찢어지는 사운드와 불규칙하게 찍어 내리는 비트, 환각적인 신스로 이를 조금 더 강렬하게 확장한다. 유사한 결을 유지하되 한층 환희에 찬 느낌의 ‘Milk & Honey .’와 고조되며 마무리되는 ‘fml .’까지의 깔끔한 흐름은 한 편의 사이버 콘셉트 비디오를 감상한 것 같은 인상도 남긴다. 그렇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부유감 속에서 가속되고 다시 원래대로 늦추기를 반복하는 사운드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지만, 끝내 일정한 긴장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질서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페이크밍크만의 리듬을 느낄 수 있는 14분이었다.
동시에 눈에 띄는 점은 이번 앨범이 이전보다 확연히 연결되는 하나의 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첫 스튜디오 앨범 [London's Saviour]에서는 ‘Phantas – Ma - Goria’, ‘Fleeting Feeling’ 같은 스킷으로 길지 않은 러닝타임 속에서도 과감히 구간을 비워두거나, ‘Air Head’처럼 다른 트랙과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소스를 활용하기도 했다. 반면 이번 앨범의 경우 인트로곡 이후 비슷한 네 개의 트랙을 연속으로 배치하고, 혼란스러운 우주적 사운드를 강하게 강조하며 다이내믹의 폭을 더욱 줄였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스펙트럼의 축소로 보기는 어렵다. 팝 랩의 ‘Makka’, 피아노를 강조했던 ‘Face to Face’ 등 이후 발표한 곡들에서 페이크밍크는 이미 다른 시도를 충분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추후 예정된 앨범이 있는 현재 시기상, 이는 보여주고자 하는 색깔을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선택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The Boy who cried Terrified .]는 자신만의 음악을 뾰족하게 드러내면서도, 곧 발매될 새 정규 앨범의 신호탄 역할로는 충분한 전략이었다. 선택과 집중, 짧고 굵은 임팩트가 주는 기대효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 '제트', '태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