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이라는 명칭을 반납할 때

CD의 종말, 굿즈가 된 앨범

by 고멘트

최근 들어 파격적인 형태의 음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이어부터 슬라임, 싱잉볼, 괄사 마사지기까지. 갈 데까지 갔다는 말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콘셉트와 퀄리티, 실용성까지 챙겼다며 우호적인 분위기이다. 다들 무의미하게 버려지는 포토북보단 실용적인 MD(굿즈)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음반은 이제 팬이 아니어도 갖고 싶은 물건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변화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걸 어디까지 '음반'으로 볼 수 있을까?



음반이 MD로 변화하는 과정


모두가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지금, 실물 음반의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 기획사 입장에선 단가가 낮은 스트리밍의 수익 구조와 다르게 실질적인 매출을 보장해 주는 주요 수익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 대중에게 CD는 더 이상 음악을 듣는 데 필수적인 저장 매체가 아니다. 집에 CD 플레이어가 없는 사람도 많다. 그렇기에 지금의 음반의 존재 가치는 듣는 것이 아니라 소장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내가 이 가수와 음악을 좋아한다는 징표로 디지털 데이터가 아닌 '실제 물건'을 방에 전시하고 싶은 마음이 지금의 실물 음반 시장을 지탱하는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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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케이팝 음반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이들은 소장을 원하는 팬들에게 반복 구매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상술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먼저 포토카드, 포토북, 포스터, 스티커 등 구성품을 강화하는 전략이 있다. 앨범 구매 시 부여되는 팬싸인회나 공개방송 응모 기회 역시 앨범의 구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중 팬들의 수요가 가장 높은 구성품으로는 '랜덤 포토카드'가 있다. 여러 버전의 포토카드를 모두 수집하거나, 원하는 포토카드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수십 장의 앨범 구매를 유도하는 식이다. 다른 콘셉트의 포토북과 구성으로 여러 버전을 발매하는 것, 멤버별로 표지가 다른 음반을 발매하는 것 역시 팬들의 수집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음반의 판매 전략은 소장 욕구를 극대화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가방, 키링 등 실용적이면서도 트렌디한 패션 아이템을 넣는다거나, 해당 그룹의 팬이라면 가지고 싶을 오브제를 넣는 식이다. 일반적인 음반이 2만 원대라면 이런 특별한 MD 형태를 띠고 있는 음반은 10만 원대로 책정되기도 한다. 양으로 승부하던 전략에서 질로서 승부하는 전략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음반은 점점 더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를 넘어서, 가지고 싶은 물건으로 변화하고 있다.



IP 비즈니스라는 이름의 주객전도


아주 오래전 패션 화보를 보는 듯한 포토북이 추가된 시점부터 음반은 팔기 위해 설계된 상품이었고, 당연히 어떤 회사도 상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이런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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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경쟁의 기준이 음악이 아닌 자본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음반은 음악을 중심으로 부가적인 것들을 강화해 왔고, 이제는 아예 다른 용도를 가진 물건에 음악을 얹고 있다.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MD 형태의 음반 역시 초반에는 'CDP'와 같이 음악을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에선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액세서리'나 '슬라임'처럼 갈수록 음악과는 관련 없는 물건으로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곧바로 제작과 비용의 문제로 이어진다. 포토북이나 포토카드처럼 제작하기 쉽게 보편화된 상품이 아닌 새로운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획부터 생산, 유통까지 전 과정에서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악의 퀄리티'가 아닌 '굿즈의 퀄리티'로 경쟁하는 순간 경쟁의 기준은 물량과 제작비로 재편된다. 중소 기획사는 자본 싸움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둘째로, 이러한 변화가 문화 산업의 고부가가치 속성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오는 MD 형태의 음반들은, 음반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설명과 함께 등장했다. 예시로 청춘 콘셉트인 킥플립의 ‘카메라’와 귀여운 콘셉트인 아일릿의 ‘리틀 미미 인형’이 있다. 그룹의 콘셉트에 맞는 물건을 가져왔기에 팬들에게도 흥미로운 콘텐츠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온라인에서의 음악 소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고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음반의 형태 변화 역시 음악의 소비 방식이 달라진 데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악은 본래 형체가 없는 무형 자산이기에, 그 가치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특정 사물에 가두는 순간, 팬들의 창의적 해석 경험은 제한된다. 음반의 가치 역시 해당 물건의 가치로 수렴된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음악이 제조 원가와 실용적 기능성으로 판단되는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케이팝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


사실 MD의 발달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는 타 산업군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충성도 높은 팬덤이 존재하는 산업만의 독보적인 경쟁력이다. 신발 회사가 아무리 예쁜 MD를 신발 박스에 넣는다고 해도, 소비자들이 그 신발을 수십 켤레씩 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MD가 팬들이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역시 긍정적인 변화로 보인다. 실제로 대형 기획사에서는 MD 매출이 핵심 수익원으로 떠오르는 추세이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MD의 진화'가 '음반 산업의 퇴행'을 담보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케이팝 음반만이 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아닐까 싶다. 케이팝은 음악 외에도 비주얼, 퍼포먼스 등 여러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종합 예술이다. 그렇다면 팬들이 소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MD에 음반을 끼워 판매함으로써 단기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임시방편을 택하기보다, 그 자체로 소장하고 싶은 가치를 지닌 예술품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랜덤 포토카드가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놀이로 자리 잡은 것처럼, 팬들이 재밌어하고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로 인해 중소 기획사들이 더 많은 제작비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MD가 음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음반이 가진 본연의 가치와 산업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길이다. 이제는 음반이라는 명칭을 반납해야 할 때가 아닐까. 담는 그릇을 예쁘게 꾸미는 것만큼이나, 그 안에 담긴 본연의 가치가 흐려지지 않도록 산업 전체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껍데기만 화려한 음반은 언젠가 팬들에게도 '예쁜 쓰레기'로 남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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