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돋.명은 ‘숨겨져 있던 소름 돋는 명반’의 약자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명반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앨범들을 선정해 심층 리뷰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너무나 매캐했던 그의 음악
정준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름 한번씩은 다 들어봤을 것이다. 당장 노래방만 가도 ‘안아줘’나 ‘고백’ 같은 곡은 인기차트 상단에 늘 자리 잡고 있으니까. 대중들에게 정준일은 어떤 이미지일까? 아마 그냥 발라드를 하는 평범한 가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다. 그냥 고음이 막 화려한 건 아니고, 노래 감성적으로 만들고, 음색 좋고 … 하지만 정준일의 커리어를 쭉 돌아본다면 그 이미지는 단지 편견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20 정준일 소극장 콘서트 '겨울' 리허설 사진. 출처 엠와이뮤직 블로그
문제의 시작은 2016년 1월에 발매한 EP [UNDERWATER]다. 2년전에 발매했던 [보고싶었어요]의 타이틀 곡 ‘고백’은 대히트를 기록했고 2015년에는 인기가수들만 할 수 있다는 라이브 앨범을 발매하기까지 했다. 탄탄대로에 오른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UNDERWATER]라는 앨범을 내버렸다. 그 앨범이 대체 무슨 앨범이었냐고? 일단 1번 트랙 ‘USELESS’는 말 그대로 자신이 ‘쓸모 없다’고 자책하는 내용으로 ‘나는 하나도 쓸모 없는 놈인가요, 그럼 난 살아갈 가치도 꿈도 없는 놈인가요’ 라고 되뇌인다. 타이틀 곡 ‘PLASTIC’은 해석이 분분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낙태에 대한 얘기라는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IAN’ 역시 'USELESS’의 연장선으로 ‘재워줘 나를 내가 날 볼 수 없게 엉망일 날 숨기게’와 같은 가사들로 노래를 채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연주 트랙 ‘WE WILL MEET AGAIN’은 희망적인 이름과 달리 가장 섬뜩한 트랙이다. 사실 노래 자체는 어두운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앞선 트랙 들에서 그렇게 죽을 것처럼 해놓고 갑자기 밝은 피아노 연주가 나오며 ‘우리 다시 만날 거예요’ 라고 하니까 더 무섭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정준일의 어머니도 이 ‘USELESS’를 듣고 아들을 걱정해 집의 모든 약물을 체크하셨다고 하니까 말이다. 평론가들은 기존 발라드에서 벗어나 색다른 음악을 선보인 이 앨범에 호평 일색이었다. 기존 정준일의 음악이 어두운 면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본격적이진 않았었으니까. 솔직히 나도 좋았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그냥 어쩌다 한번 시도한 줄 알았다.
몇번의 싱글을 거친 후 이듬해 발매한 [더 아름다운 것] 역시 얼핏 듣기엔 밝아 보이지만 뜯어보면 여전히 비관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트랙이 ‘북극곰’인데, ‘사람들은 이 곡이 다 긍정적인 노래 인줄 알지만 가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마지막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노래다’ 고 공연에서 밝힌 적이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쓸 때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후도 다 비슷하다. 2018년 발매한 EP [ELEPHANT]는 대놓고 [UNDERWATER]의 연장선이었고 그 후에 그는 스스로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결국 도피의 일환으로 자작곡이 아닌 커버 앨범을 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정리(整理)] 앨범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해 이런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릴 때 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진짜 은퇴할 줄 알았다. 아니면 몇 년 휴식기를 가지거나… 아무튼 요약하자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정준일의 음악은 지독하게 우울했다. 이동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매캐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심연에서 우물을 끌어올리듯, 나를 길어 올리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지 몰랐어요”
4집 [LOVE YOU I DO]. 출처 지니뮤직 2019년 10월에 발매한 4집 [LOVE YOU I DO]의 소개 문구이다. [더 아름다운 것]처럼 이규리 시인의 시가 들어가 있지도, [UNDERWATER]처럼 이동진 평론가의 소개 글도 없고, 저 한문장이 전부이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두 번 놀랐는데, 처음엔 순수하게 문장이 이뻐서 놀랐었다. ‘예전보다 밝아질 수 있었다.’를 이렇게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 후엔 내용 그 자체에 놀랐다. 드디어 길어 오른 것인가? 그렇다면 음악은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나를 감쌌다.
첫 트랙 ‘가을꽃’에서부터 그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사운드나 분위기 자체는 ‘북극곰’과 유사했지만, 가사에는 희망으로 가득하다.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면 내가 별이 될게’, ‘나의 가을은 온통 그대였었네’와 같은 가사들. 비록 상황 자체는 이미 비극으로 끝난 상황이지만 전반적인 무드는 체념과 이별이 아닌 축복의 정서가 강하다. 그 외의 ‘스물’ ‘Girls’와 같은 트랙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고 긍정적이다. ‘영원’은 어떠한가. ‘나는 용서해 만족해’로 시작해 이윽고 ‘누가 용서를 말해 아직 나는 아닌데’로 마무리 짓는다. 앨범에서 가장 비관적인 ‘꿈’은 오히려 반갑다. 밑도 끝도 없이 ‘난 죄인이야’ 라고 읊조리는 게 아니라, ‘난 두려워 나도 날 떠날 까봐’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마음이 아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책이 아닌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왜 아픈지를 밝히는 것은 생각보다 쉽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테다. 확실히 정준일은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심연에서 벗어난 뒤 그때의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90년대 키드를 넘어서
음악 얘기를 해보자. 정준일의 장르적 특징, 음악적 포지션은 ‘한국 90년대 팝 발라드의 적자’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발라드를 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음악에는 무언의 오마쥬로 가득하다. 메이트 시절 ‘난 너를 사랑해’와 같은 곡을 비롯해 1집의 ‘안아줘’나 ‘괜찮아’, 혹은 ‘겨울’과 같은 락발라드 성향, 혹은 어쿠스틱 장르의 곡들은 이소라 남자판인가 싶을 정도이고, ‘고백’과 같은 오케스트라 편성의 발라드 대곡, 혹은 ‘우리의 밤’같은 월드 뮤직의 성향이 짙은 곡은 김동률의 그것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이승환의 음악도 느낄 수 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이나 ‘하늘을 날아’와 같은 미디엄 템포 팝락은 언제나 스스로를 ‘락커’라 칭하는 이승환의 창법과 작법이 느껴지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오마쥬가 아닌 레퍼런스의 영역에 닿아 있다고도 느껴진다. 그렇다. 정준일은 음악은 잘 만들지만 분명히 ‘독창적인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랑은 거리가 멀었다.
이번 앨범은 그런 우려를 어느정도 불식시킨다. Radiohead의 ‘Lifted’가 떠오르는 얼터너티브 락장르의 곡 ‘영원’은 이소라 8집 외에는 한국 내에서 마땅히 떠오르는 레퍼런스가 없다. ‘꿈’과 ‘얼음강’은 역시 스트링이 돋보이는 발라드이긴 하지만 탑라인 측면에서 신선함을 주기 충분하다. 새롭지는 않지만 충분히 본인만의 아이덴티티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당시 떠오르던 신예 박문치와 함께 한 ‘Girls’는 마치 ‘레퍼런스 음악이 아니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물론 다들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스물’은 누가 들어도 정준일 버전의 ‘취중진담’이기도 하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팝 발라드 씬에서 단순히 남의 전철을 밟는 것 그 이상의 시도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재즈 피아니스트 정준일
이쯤에서 TMI 하나 더. 정준일의 팬들이라면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원래 꿈은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그 중에서도 Bill Evans를 너무 동경해 뉴욕의 Village Vanguard에서 공연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고 공연에서 심심치 않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재즈에 대한 회의감과 동시에 스스로 벽을 느껴 포기했다는 새드 엔딩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그이지만, 정작 본인의 곡에서 정준일의 피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앨범 크레딧에는 항상 권영찬이나 송영주, 나원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연주한 ‘유월’과 같은 곡들도 연주력의 비중이 크지 않은 분위기 음악에 가깝다. 공연에서도 앙코르 타임에나 코드 위주로 연주하는 정도였지, 공연 하나를 오롯이 그의 피아노로 채운 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LOVE YOU I DO’ 역시 강해진 정준일의 반증이다. ‘유월’이나 ‘WE WILL MEET AGAIN’ 같은 발라드 넘버가 아니라 재즈 연주 곡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참여를 했다. 게다가 솔로 연주까지 넣어서! 물론 그 연주가 엄청 뛰어나다는 인상은 아니다. 분위기에 맞추려는 의도 탓인지 보이싱이나 솔로 자체는 너무나도 무난하다. 군데군데 Bill Evans도 느껴지고. 하지만 다른 세션들에게 위임하지 않고 처음으로 직접 재즈 연주 선보였다는 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년 11월 17일 그는 'LOVE YOU I DO'의 연주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올랐다. 출처 Club Evans
옥의 티?
물론 이 앨범이 완전무결한 앨범은 아니다. 이 앨범의 가장 큰 결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이틀 곡 ‘그래 아니까’에 있다. IZM에서도 지적한 사항이지만 이 곡은 [LOVE YOU I DO]를 대표하지 못한다. 기존 정준일의 타이틀 곡을 답습했기에 전혀 새롭지도 않고, 가사적으로도 달라진 그를 확인할 수 없다. 대중이 좋아하는 곡을 하나 넣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던 것인가. 타이틀 선정에 있어서 조금만 더 과감했으면 이런 곡을 굳이 수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꿉꿉하게 들러붙는다.
‘Girls’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박문치와의 콜라보, 거기에서 오는 신선함은 충분히 의의가 있으나 앨범 구성적으로 봤을 때 혼자 너무 돌출 돼있다는 인상이다. 리얼 세션 위주의 트랙들 사이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레트로 사운드라니. 가사 역시 내면의 이야기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는 유일한 곡이다. 더 최악인 것은 갑자기 ‘소녀의 작은 꿈은 두려움 없이 그저 밤 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하는 가사이다. 4050대 아저씨가 ‘청춘 힘들지, 다 알아 힘내렴~’ 하는 거랑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깊은 사색과 공감 없이 탄생한 가사는 우리를 전혀 위로해주지 못한다. 차라리 보너스트랙이나 싱글로 발매했다면 어땠을까?
정준일 '그래 아니까' 뮤직 비디오.
다시 어둠 속으로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밝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앨범을 발매한 후 약 반년 뒤, 그는 배우 정은채와 10년 전 있었던 불륜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내지고 만다. 논란 직후 조용히 발매한 싱글 ‘다만 내가 잊지 않으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둡다. ‘나는 슬프게도 나로 태어나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랬다’ 라니. 전후 사정을 알아서 그런지 내가 들었던 그 어느 음악보다 불쾌하고 절망적이었다. 이 글에서 본 논란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고, 예술인과 과거사에 대한 상관 관계로 논쟁을 벌일 생각도 없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그 일로 인해 지독하게 아팠다는 것뿐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비교적 밝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놀면 뭐하니?’에도 곡을 제공하기도 했고 말이다.
앨범을 낸지 햇수로 벌써 4년이 다 되간다. 그는 직간접적으로 곧 앨범이 나옴을 암시하기도 했다. [LOVE YOU I DO]는 그 당시 2019년의 정준일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를 담은 앨범이었고 그래서 의미가 더 특별했다. 지금 역시 앨범 서사의 재료는 충분하다. 이제 나올 앨범은 또 어떤 내러티브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수는 결국 앨범으로 말하는 법이니까.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