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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멘트 Mar 05. 2023

숨.돋.명 ② 피타입 [The Vintage]

이 앨범은 힙합이 아닙니다.

숨.돋.명은 ‘숨겨져 있던 소름 돋는 명반’의 약자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명반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앨범들을 선정해 심층 리뷰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랩은 또 다른 드럼


 피타입 (P-TYPE, 이하 피타입)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 힙합의 전설이다. 90년대부터 SNP 등에서 활동하며 한국 힙합의 라임론을 제시했고 2004년에는 명반 [Heavy Bass]를 발매해 한국 힙합 씬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 올렸다. 치밀한 라이밍, 그 누구보다 진중했던 가사, 샘플링을 통한 세련된 비트 … ‘힙합다운 힙합’에서의 말을 빌려 그의 라임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랩은 또 다른 드럼’이다. 처음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드럼의 킥과 스네어 위치에 정확하게 라임을 꽂아 넣는다. 그 라임을 통해 리듬을 형성하고 하나의 거대한 Flow를 형성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하프타임 리듬으로 연주하는 Trap 등 다양한 장르가 새로 등장하면서 이 정박 위주의 Flow가 제대로 먹히지 않게 되고 몇몇 리스너들에게 “한 물 간, 올드한 래퍼’라는 혹평을 듣게 되기도 하지만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전설이고 선구자이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 힙합의 라이밍 스킬은 몇 년은 더 정체됐을 것이다.




폭력적인 잡종문화


 그렇게 한국 힙합의 한 축이던 그는 돌연 어떤 논란에 휩싸이고 만다. 힙합을 “여러인종과 그들의 여러 전통문화가 뒤섞인 가운데 각자 자기네 존재의 증명을 목적으로 태어난 문화.” 즉 한 단어로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당연히 당시 좁고 좁던 한국 힙합 씬에 투하된 커다란 폭탄이었고, 각자 자기만의 의견을 피력하며 늘 싸움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때 가장 유명했던 랩퍼가 바로 산이 (San E)이다. 2008년에 발매한 믹스테입 [Ready to be Signed]와 그 앨범의 수록곡이자 버벌진트 디스곡인 ‘재밌쎄요?’, 그리고 같은 해 발매한 피타입 디스곡 ‘Bye P Type’을 통해 그는 한국 힙합씬의 가장 뜨거운 루키로 등극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실 이 말은 무맥락적인 힙합 디스라기보다는 힙합의 원류에 대한 요약을 내포하며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렇게 워딩을 순화해서 말하기에 2008년의 피타입은 너무 지쳐 있었다. 돈벌이가 안되는 힙합에 회의감이 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시기 피타입은 스스로 “래퍼 피타입”이 아닌 “Neo Soul 아티스트 피타입”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옛날 음악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그랬던 “Neo Soul 아티스트 피타입”이 들고 나온 앨범이 바로 2집 [The Vintage]이다. Intro 트랙에서 말하길 그는 “나는 결국 옛날 LP 시대의 음악을 좋아한다. 옛날 작법 그대로 한번 음악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하며 이 앨범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랩이 없었을 테니까 …”는 말도 덧붙이면서. 당시 인터뷰에서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힙합이라는 이름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한, 조금 더 뿌리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였다. 의도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이었다. 그러기 위해 보컬 수단을 노래가 아닌 랩으로 선택했다. 즉 이 앨범은 랩을 뱉기 위해 이 앨범을 만든 것이 아닌 이 (고풍스러운) 음악을 먼저 만들고 새로운 시도로 랩을 넣어 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비를 위한 발라드’


 거창한 선전포고를 뒤로 하고 ‘비를 위한 발라드’가 본격적인 포문을 연다. 재즈 피아니스트 Gina가 참여한 이 트랙의 인트로 연주를 듣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완벽한 Jazz 연주 그 자체가 아닌가. 샘플링 루핑이 아닌 리얼 세션이 녹음한 이 노래는 이전의 한국 재즈 힙합과 궤를 달리 한다. Verse 2 도입부의 건반 코드 워킹이라거나, Chorus 2에서 랩과 건반의 주고받음 (Call and Response), 혹은 Bridge 파트에서 Swing으로의 리듬 전환과 Outro의 장대한 건반 솔로 등 … 모든 면에서 세밀하게 공들인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를 받치는 랩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앨범의 지나친 라임 위주의 정박 랩에서 훨씬 진일보 된 랩 디자인을 선보였다. 서막을 여는 트랙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곡이다. 이 앨범은 시작부터 달랐다.



아버지는 drum, 아들 놈은 mic


 앞서 말했듯 이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은 리얼 세션이다. Jazz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즉흥’이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서 ‘Jazz에서 즉흥이 필수불가결이다’ 라는 것엔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지만, 21세기 가장 성공한 색소포니스트 중 한명인 Kamasi Washington이 ‘즉흥 연주가 약하다’라는 이유로 그의 실력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것을 보았을 때 Jazz에서 즉흥이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대부분의 재즈 힙합에서 즉흥은커녕 제대로 된 (반복되지 않는) 솔로 연주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재즈 힙합’이라는 워딩 자체에도 다소 어폐가 있게 되는 것이 말이 재즈 힙합이지 실은 그냥 샘플링을 통해서 Jazzy한 느낌을 첨가한 정도에 가까웠던 것이 기존의 재즈 힙합이 아닌가. 피타입 역시 이 부분에 의문을 가졌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샘플링 자체에도 의문을 가졌다. 다시 한 번 인터뷰를 빌리자면 "내가 왜 이 노래를 샘플링해서 만들어야 되지? 이걸 직접 해야 동급의 아티스트로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닌가?"라고 느꼈다. 그 의문의 결과물이 바로 이 앨범이다.




 재즈 드럼 연주자이자 한국 드럼의 전설인 아버지 강윤기씨가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 블루스의 전설인 박광수, 최고의 기타 세션 함춘호 등 여러 전설들도 힘을 보탰다. 건반의 Gina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성훈, 콘트라베이스의 전성식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젊은 피들이다. 활동 시대를 막론하고 섭외된 세션들은 이 앨범에서 마음껏 날뛴다. ‘Music City’나 ‘A Long Time Ago’에서는 한껏 Funky하고 ‘Happy People’이나 ‘소나기’에서 이병호의 기타 연주는 그 어떤 곡보다 센치하다. 그렇다고 연주가 너무 과해 랩이 묻히거나 하지도 않는다. 실로 완벽한 배합이다.



킬링 트랙 ‘수컷’


 이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트랙은 뭐니뭐니 해도 당연히 7번 트랙 ‘수컷’ 일테다. 전성식과 콘트라베이스와 강윤기의 드럼 위에서 피타입은 정묘(精妙)하게 짜여진 라임으로 랩을 수놓는다. 단언컨대 이 Bluesy한 리듬 속에서 피타입보다 더 뛰어나게 랩을 뱉을 수 있는 MC는 한국에 없을 것이다. 랩 스킬적으로 현대에 더 뛰어난 MC는 많겠지만 이 노래에서는 명함을 내밀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플로우로 랩을 하지만 그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노래하는 뿔난 괴물’ ‘수사자의 몸동작’ ‘꼬리 펼친 공작새’ ‘추방당한 희귀종’ 등 고독하고 하드보일드한 수컷에 대한 메타포 또한 시적이다. 나는 이 곡에서 아쉬운 점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딱 하나 흠결을 찾자면 Verse 3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시인을 위한 시 항시 목을 조른다


 ‘젊은 날의 초상’과 ‘소나기’, ‘후유증’을 거쳐 드디어 마지막 트랙 ‘Poetry Sayer’가 우리를 반긴다. 다른 트랙과는 달리 더 콰이엇 (The Quiett)이 (트럼펫을 제외하고) 샘플링을 비롯한 가상악기 프로그래밍으로 완성시킨 이 유일한 트랙은 그 막을 닫는 트랙으로 더 할 나위 없다. Verse에서는 앞선 트랙에서 등장한 다양한 악기들과 대비되는, 담백한 ‘전통’ (웃음) 재즈 힙합 비트로 분위기를 갈무리하고 종장에는 최진현의 트럼펫 솔로로 마무리 짓는다. Verse 2의 마지막 가사인 ‘시인을 위한 시 항시 목을 조른다’는 지난 몇 개월 워딩 하나로 홍역을 치른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우아했다.




옥에 티?


 이렇게 앨범을 다 듣고 나니 아이러니하게도 첫 트랙 ‘비를 위한 발라드’가 아쉬워진다. 곡의 퀄리티 적인 문제는 아니다. 곡의 세션 구성 탓인데, ‘비를 위한 발라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트랙은 어쿠스틱 기타와 여러 종류의 관악기가 메인 악기로 쓰이게 되지만 이 트랙만이 예외적으로 건반이 메인으로 등장한다. 퍼커션이 등장하지 않는 몇 안되는 트랙이기도 하고, Blues과 Soul, Funk 등의 장르랑도 가장 거리가 멀다. 가장 순도 높은 Jazz + Hiphop이긴 하지만 다른 트랙들은 Jazz 외의 다른 장르적인 요소가 녹아 있기 때문에 이 트랙은 앨범 내에 완전하게 섞이지 못한, 일종의 불순물로 남게 된다. 이 곡 자체는 완벽하기에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차라리 앨범 전체적으로 이렇게 Jazz에 가까운 트랙이 몇 개 더 있었으면 조화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이 앨범은 힙합이 아닙니다”


 2010년 한국 대중 음악상에 이 앨범이 베스트 힙합 앨범 부문으로 노미네이트 되자 피타입은 “이 앨범은 힙합이 아니니 당장 내려 달라” 고 말했다 한다. 이 앨범은 진짜 힙합이 아닐까? 만약 누군가에게 앨범의 장르를 단 하나로 정의한다면 ‘힙합’이라고 답 할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게 왜 힙합인지는 그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힙합’임을 정의하는 그 음악적, 장르적 약속은 무엇일까? ‘보컬이 적고 랩이 많으니 힙합이다’로 설명하며 넘어가기엔 뒷맛이 씁쓸하다. 


 실제로 피타입이 “이 앨범은 힙합이 아니다”라고 말한 배경에는 진짜 힙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보다는 발매 전 “힙합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했기 때문임이 더 큰 이유일 것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의 말 자체는 깊게 반추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힙합이라는 장르는 그 어떤 장르들보다 범위가 모호한 장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마치며



 지금에야 흑인 음악 밴드 프롬올투휴먼 (from all to human)이 참여한 Deepflow의 앨범 [Founder]라던가 장고 (Django), 쿠마파크 (Kumapark) 같은 재즈 힙합 밴드들이 등장했고, 미국 언더 힙합에서도 리얼 세션을 기용한 재즈 힙합 앨범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들을 수 있다지만 당시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이런 시도를 쉽사리 하지 않았다. 그나마 Common과 The Roots 정도였을까? 심지어 2008년은 미국 내에서도 재즈 힙합 열풍이 사그라들고 Dirty South 같은 클럽 튠의 힙합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힙합이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2008년에, 지금 들어도 이토록 세련된 앨범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옛 고전 음악을 사랑하던 피타입만이 가능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고평가 받을 것이다. [Heavy Bass]가 한국 힙합의 시작을 열은 앨범 중 하나라면 [The Vintage]는 한국 힙합을 새로운 경지에 다다르게 한 앨범 중 하나이다.



인터뷰 출처


피타입ㅣ'한국힙합', 폭력적이고 잡종적이지 않게 로컬라이징에 성공했나?



By 베실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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