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11.0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열녀를 위한 장례식>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 걸렸네요. 매번 왜 이렇게 오래 걸리고 매번 왜 사연이 있냐 하실 수도 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공연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됩니다. 내가 기대하는 공연의 타이밍과 실제 공연이 되는 타이밍은 절대 같을 수 없고,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을요. 인생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공연이라고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3년전으로 돌아가서, 2020년에 강원도립극단에서 강원도 소재 시놉시스 공모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전해에는 희곡 공모가 있었고, 그걸 기억하던 동료 배우가 한번 지원해 보라고 알려줘서 공모가 뜨길 기다렸다가 보니, 시놉시스 공모로 바뀌었더라고요.
저는 살면서 강원도를 대학생이 된 이후에 처음 가봤습니다. 가족의 군면회가 처음이었고(...) 학과 학술조사로 강릉 단오제에 갔던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호남의 굿과 강원의 굿은 다르다고 수업 때 배웠지만-당시 학과의 희곡 전공 교수님은 민속예능 전문가로, 희곡보다 굿을 더 많이 봐야 했습니다-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때 단오제 때 무당과 박수, 어른 아이할 것 없이 지역민 상당수가 참여하는 횃불 퍼레이드는 굉장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열기와 에너지가 도시를 가득 채운 어질어질한 기운과 기분. 강릉관노가면극도 엄청나게 대충격이었습니다. (여러분, 장자마리를 가까이서 보신 적이 있나요. 아주 충격적이고 매력적인 비주얼의 독특한 존재입니다. 언젠가 장자마리에 대한 무언가도 써보고 싶어요.) 아무튼, 강원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여러 고민이 되었죠. 그리고 많은 참여자가 가장 기피할,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었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라는 위대한 문인도 중요합니다만, 그 이후의 강원도와 그곳의 글 쓰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뛰어난 이른바 '여류문인'을 배출한 곳이잖아요. 어떤 위대한 문장가가 탄생하고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나버리는 걸까요? 그 문장가가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문장과 시문들은 그 땅에 어떤 결실들을 맺게 할까, 게다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 하는 질문들이 떠올랐거든요. 하지만 허난설헌은 죽으면서 자신의 시문을 다 불태우라고 말했고, 그 동생 허균은 간직했던 누나의 시와 외우고 있던 시들을 적어 200편 정도를 1598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사신에게 시를 전해줍니다. 이때 허난설헌의 시는 명나라에서 출판되고, 이후 일본에도 간행되어 조선에 역수입된 것이 1692년입니다. 허난설헌이 죽은 지 1백여 년이 지난 후죠. 그녀가 죽은 지 백 년의 텀을 두고 다시 역수입된 시집을 읽은 여자들은 누구이며, 또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이후 세대들이므로, 예전보다 한층 더 강화된 '열녀 이데올로기'를 요구받았을 때입니다. 수절만으로는 열녀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까지도 강요받는 문화 속에서 허난설헌의 시를 읽는 여성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상상은 '읽는 여자'들은 정말 '읽는 것'에서 그쳤을까, 하는 질문으로도 연결되었습니다. '쓰는 여자'들의 계보를 추적하고 싶은, 혹은 만들고 싶은 마음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박씨전이 떠올랐습니다. 작자미상의 숱한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기이했던 그 소설. 저건 여자가 쓴 것이 아닐 수가 없다고 항상 생각했었습니다. 거기에는 여자들이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가득 들어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어떤 여자들이 함께 모여 쓴 것이 '박씨전'이라면, 특히 허난설헌의 후예들이라면 어떨까 하는 것이 발상의 시작이었습니다. 박씨전에는 여러 이본이 있지만, 박씨전의 시아버지 이득춘이 '강원 감찰사'를 하던 시절에 박 씨의 아버지를 만나며 혼담이 시작하는 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 하나를 붙잡고 박씨전을 강릉의 여자들이 규방에서 모여서 몰래 썼다는 가설로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시놉시스가 쓰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규방에 모여 소설을 쓰며 겪는 코미디였죠. 그래서 제목이 <규방-소설 쓰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강원도청도 그때 처음 가봤어요.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혼자 막국수도 먹고 경춘선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납니다.
최우수상 작품은 공연이 되었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우수상 수상작인 <규방>의 공연 제작은 무산되었습니다. 상을 받은 기쁨도 잠시, 희곡이라는 실체는 아직 없던 제 시놉시스는 표류, 혹은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공개돼버린 시놉시스인 데다 수상까지 해버렸기 때문에, 대본으로 완성되더라도 제작은 더욱 요원해질 수밖에요. 왜냐면, 온전한 창작극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을 것이니까요.
빠른 기쁨과 빠른 슬픔이 교차하는 2020년. 여름이었다...
<계속>
<열녀를 위한 장례식>
2023.10.27-11.0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작 진주 연출 이인수
출연 김주연 박소연 변효준 송인성 신강수 윤현경 이강우 이선휘 이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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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대학로 예술극장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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