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홍련> 이야기 속 영업방식
2022년 재미있게 본 영화와 음악, 그리고 아픈 일들이 흐려진다. 빠져든 만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고 계속 좋아할 것 같더니 뇌는 한 달 이상 관심을 지속하지 않았다. 미디어는 정교하게 나를 유혹하므로 포털 메인화면을 보지 않는다. 샴푸 린스병은 제품 정보가 보이지 않는 쪽으로 둔다. 아침에 맞닥뜨리는 신문 헤드라인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아 신문도 지난해는 끊어보았다. 텍스트에 민감해지고 있다. 글자가 이미지처럼 입력되기 때문에 최대한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책 보기 싫으면 책장을 읽는다. 책등에 있는 제목들은 한 줄 세로 메시지가 되고 연속한 다른 제목과 서로 달라붙는다.
지난 가을에 좋아한 영화는, 대본집을 구매했던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은 분석할 수 없을 여성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이힐 신고 붉은 섀도 칠한 이영애의 '금자'씨처럼 포착할 수 없는 내밀한 그 내면을 말이다. 투명한 섬유질 같은 그것을 핀셋으로 탁 집어내는 예리함. 영화감독은 노련한 사냥꾼 같다.
여름은 <나의 해방일지>에 빠져 있었다. 천둥 번개가 쳐도 미동하지 않는 그녀에게 반했다. 한밤중에 갈대가 살풀이 춤추는 언덕을 오를 때 나는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풀어놓는 장면이 좋았다. 그리고 드라마를 쓰는 작가에 대한 경외가 일어났다. 재미있는 볼거리를 만드는 제작진이라는 모호한 집단에서 작가의 존재가 쑥 솟아나왔다. 정말 당연한 사실을 처음 알았다. 드라마를 쓰는 작가는 나보다 만 오천 배 똑똑한 사람임을.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했을까? <나의 해방일지>는 이것을 깨우쳐(?) 준 작품이다. 어둠을 묘사한 모든 것에 끌리지만, 이렇게 전원일기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공포영화보다 무시무시할 때가 있다.
무시무시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건 <장화, 홍련>때문이다. 어려서 전래동화를 읽었을 때 예쁜 언니가 죽다니 슬프구나! 했다. 그러나 사또가 부임하는 족족 죽어나는 것은 곤란했다. 왜 물귀신처럼 나타나나요? 으스스하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겨를도 없지 않습니까. 영화화된 이야기는 더욱 그로테스크했다. 변주에 변주를 거듭한 정신세계는 잔꽃무늬 벽지보다 어지러웠다. 두 소녀는 아름답다. 혈색 좋은 뺨과 맑은 눈빛. 하지만 고운 영상뿐이었다면 지금까지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한 민트그린 싱크 아래 검게 고인 어둠처럼, 끔찍한 공포가 있었다. 내가 응시하자 그 괴물은 튀어나왔다. 귀신은 매번 창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각적인 집중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래서 장화는 사또 앞에 소복에 흑발을 풀어헤친 채 괴이한 목소리로 접근했다. 평범한 모습으로 청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헤어질 결심>을 구덩이에서 마시는 독주처럼 지독한 '결심'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처녀가 잠옷 차림으로 한밤 중에 나타나면 그 부탁 떨치기 어렵다.
노란색에 핑크로 인쇄된 다니엘 핑크 <파는 것이 인간이다>를 노려본다. '판다'는 개념은 취업 면접 볼 때 처음 접했다. 포트폴리오를 펼쳐 놓은 햇병아리는 어떤 의도로 작업했는지 열심히 알릴 작정을 하고 면접관을 만났다. 정장 차림의 젊은 임원은 "자, 이제 당신이 만든 것을 내게 팔아보라."고 명료하게 주문했다. 애송이가 떠드는 것을 10분 이상 들어주었다는 점에서 참 친절한 분이었다. 그러나 모호한 설명은 그 사람을 뚫을 수 없었다. 나는 근사한 그 회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영업은 요리와 같을 것이다. 집중해야 하고 재료마다 타이밍이 생명이다. '할 만큼 했고 있는 그대로 나를 100퍼센트 받아들여 주세요'는 상대도 일찌감치 눈치채고 물러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실은 모든 사람이 제대로 영업당하길 기다리고 있다. 미국 드라마 <홀트 앤 캐치 파이어>에 나온 83년 IT 박람회에 등장한 애플 쇼케이스가 그렇다.
라스베이거스에 모인 사람들. 화려한 호텔방에 새우를 쌓아 올린 파티음식과 샴페인. 주인공들이 어렵게 마련한 객실에서 그들이 만든 휴대용 컴퓨터를 선보인다. 흥분한 사람들이 제품 시연을 기다리는 동안 세일즈맨 '조 맥밀란'은 현란한 화술로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린다. 그들의 컴퓨터 '자이언트'는 아직 침실에서 최종 점검 중이다.. 주인공 4명의 이야기가 롤러코스터를 탈 때 모든 것을 뒤집는 한 컷이 있다. 매킨토시를 시연하는 방에 우연히 맥밀란이 들어선다. 그의 동공이 확대된다. 충만하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아늑한 동굴처럼 꾸며진 방에는 하얀 초가 매킨토시 양쪽에 여러 개 켜져 있다. 컴퓨터가 켜진다. 미소 짓는 아이콘과 함께 매킨토시가 인사한다. 인간과 소통하는 감성 있는 컴퓨터는 '자이언트'에서도 구현했지만 맥밀란과 그의 동료 캐머런이 최종 포기한 아이디어였다. 떠들썩한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숨겨진 장소 같은 곳에 나타난 매킨토시는 사람들을 즉시 사로잡는다. 잡스는 최후의 최후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 존재를, 상품을 드러냈다. 그의 영업은 고약하고 집요하지만 역시 판타스틱하다.
귀신의 영업 방식도 그래서 달리 보인다. 참신하고 호러블 한 이미지는 얼마나 비주얼쇼크 였을까. 그리고 장화는 죽어서도 그 미모가 여전했을 것. 한을 풀기 위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 뿐 그녀의 영업은 잡스처럼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