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첫눈이 내리고 김장에 넣을 양념 냄새에 침 고이는 시즌. 이즈음 하늘은 우유 거품을 슬쩍 흘린 듯 옅은 파란색이고 산등성이와 거리는 습기 없는 갈색으로 덮인다. 그 차분한 색 조합을 좋아한다. 그래서 눈이 오면 더 아름답다. 퇴색할수록 더더욱 애처롭게 아름답다.
1999년 겨울. 검은 부츠 속 발가락이 서서히 얼고 있었지만 북악터널을 넘어 평창동을 지날 때 버스 창문으로 내다보았던, 눈이 고슬고슬하게 쌓이던 풍경이 아직도 좋다. 그날 나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홍대 앞으로 갔다. 밀크티를 마시려고.. 그건 겨울이 시작될 때 꼭 필요한 의식이었다. 이부자리를 벗어나기 싫고 난방비 걱정에 움츠러들지만, 겨울!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저물면 나는 설렌다..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2022년 겨울맞이는 이러했다. 이종용 '겨울 아이'를 종일 듣는다. 겨울 시즌 한정으로 나온 원두를 산다. 올해 가장 특별할 이 커피콩은 부산 영도구에 있는 카페에서 만들었다. 겉포장에 겨울 풍경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설원 위에 홀로 굴뚝 연기를 피우는 낮은 집이 있다. 입구와 작은 창문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하늘은 밤이 가까워 깊은 바다색이다. 아귀가 헤엄칠 것 같은 묵직한 인디고 블루.
취향은 태어난 계절을 타는 것 같다. 인디고 블루와 블루 그레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음울하게 칠해진 무거운 하늘을 보면 압박을 느끼기보다 공명하는 기분이 들어 안정된다. 나는 여린 초록빛이 끙차 돋아나는 맑은 봄과 햇살이 선명한 여름, 절정을 달리며 결실을 맺는 가을과 동떨어져 있다. 정확하게 태어날 무렵의 날씨를 좋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정리(?)된 그 느낌을 사랑한다. 해가 넘어가고 1월이 되면 묘하게 이 정취는 사라진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는 하얀 바탕에 놓인 가지런한 물건이 좋다. 그리운 사람이 살고 있는 부산에서 온 커피를 애틋해한다. 바다도 겨울 바다가 제격이다. 차갑게 버석거리는 모래, 모근 하나하나 훑는 짠 바람. 그리고 창 밖의 눈보라에 기뻐서(?) 가슴이 뻐근하다. 이것은 일 년 중 가장 개인적인 하루, 겨울 아이를 위한 세리머니. 보름 후에 곧바로 나이가 늘어나는 이 아찔한 한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