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숙 안중근 그리고 링컨

핏줄, 그 광기와 영광에 대하여

by Gomsk

만화가 신일숙의 작품을 통해, 요정과 악령이 등장하는 세계를 알았다. <리니지>를 시작하는 작가의 말이 인상 깊다. 실은 반발했다. 혈통의 중요함과 인간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자아가 분리되는 십 대 이후 내내 의문이었다. 나는 영종대교 케이블처럼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꼬임 중의 한 타래일 뿐이라는 건가? 나는 독보적이고 나는 유일하며 나는 철저하게 개별적이다.. <리니지>에 등장하는 반왕 켄 라우헬처럼 나는 냉소했다.


신일숙 선생은 역동적인 연출에 능하다. 섬세하고 정밀하면서 적절하게 생략하는 그림체로 건장한 말의 근육과 가쁜 숨소리, 갑옷의 재질과 물 비린내에 젖은 농염한 눈빛 등 모든 것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데포로쥬 왕자를 죽이려는 반왕의 군대가 몰려올 때 분명히 나는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노예 출신 반왕이 쇠사슬에 감겨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는 검을 들어 저항하고 있다. 출중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천하기 때문에 그는 진짜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가? 이 테마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을 볼 때도 떠올랐다. 왕은 왜 귀환해야 했나요.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은 늘 따로 있는 건가요. 반왕을 조여 오는 사슬은 결국 그가 가진 운이 다했다는 뜻 같다. 정말 혈통이란 무엇일까?


의사결정의 총합이 나의 인생이다. 그렇다면 의사결정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의 성격 내 상황 그리고 내게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물리적으로 가깝게 교류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향을 받는 나 자신 그 토대는 어디서 왔는가? 아. 결국 나는 나 혼자 따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나의 뿌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호빗> 확장판에 난쟁이 왕자 '소린'을 평하는 부분이 있다. 간달프는 리븐델의 엘론드와의 대화에서 소린의 성정을 염려한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이어진 잠재된 광기. 소린은 왕자로서 난쟁이 종족의 끈질김과 용맹함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나 황금에 홀리면 눈이 뒤집히는 광폭한 면도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소린은 겨우 그 덫에서 벗어나는데 후사가 없다.. 아! 그래서 더 슬펐나 보다. 빌보가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오열했어도.


현수교를 지탱하는 굵은 케이블은 꼬임 있는 줄을 거듭 꼬아 만든다고 한다. 어지간해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주인이 나타나 레이저빔을 쏘아 녹여버리기 전까지는. 혈통의 끈끈함이 그와 같단 말인가. 나는 낙담한다. 소린의 광기가 폭발할 때보다 잠재된 상태를 감지하는 마법사와 요정을 보며 나는 떨었다. 나의 광기를 들킬까 봐. 다정하고 섬세한 성격과 대비되는, 쉽게 무너지는 마음과 폭력으로 드러나는 성향은 아버지에게서 이미 보았다. 아버지의 형제도 그랬다. 그 이전 세대는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꼽추처럼 평소에는 주변에 머리를 조아리며 반듯한 행세를 하지만 내면에 용암이 끓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용이 아닌데 음..


반왕은 자신의 인생을 반전시킬 수 없었나? 모든 것은 정해져 있을 뿐인가? 그는 다른 선택이 불가했는가. 데포로쥬 왕자가 성장하면 왕위를 물려주고 평화롭게 살 수는 없었을까? 분노의 대가는 자기 자신인 것 같다. 반왕에게 숨겨진 연인이 있었는데 바로 물귀신이었다. 물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결국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랑한다는 것과 욕망하는 것의 차이를 양면테이프 갈라지듯 뚜렷하게 보여줬다. 운명은 역행하기 어려웠으나 그에게도 인생의 항로를 수정할 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아주 작고 미미해서 무심히 넘겼을 기회가.


데일 카네기가 쓴 링컨 일대기에 링컨의 독백 같은 고백이 소개된다. 링컨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책을 좋아했고 성실하고 정직했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어 마침내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임기 중에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결국 승리했다. 그는 노예를 해방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이 위대한 스토리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링컨은 깊은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황량한 외딴집 낙엽을 채운 침대에서 곰가죽 덮고 살았던 어린 시절보다 링컨의 핏줄 이야기를 듣자 확 몰입되었다. 아. 그의 출생은 비천했다. 그 자신이 그러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누가 고난을 퍼부은 것처럼 태어난 배경이 참담했다. 업적을 분리한 링컨의 삶은 평생 고단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나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영광스러운 삶이 이와 같구나!


영화 <영웅>에서 나는 조마리아 여사의 눈물을 보았다. 어머니, 아들이 그 뜻을 이루기를 목숨보다 간절히 원함을 어찌 다 아셨습니까. 흰 수의를 손수 지으며 한 땀 한 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신 것인가요.


인간이 마음먹은 바를 이루려 하면 원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동안 극단적인 진동을 겪지 않을까 한다. 토네이도가 지면을 쓸고 가는 지옥 같은 지상과 먹구름 위의 고요한 하늘을 수시로 오가는 것처럼. 영화 <인투 더 스톰>에 이 장면이 나온다. 천국과 지옥을 토네이도에 휩쓸려 동시에 경험한 인간은 순간 모든 것을 초월한다. 죽음의 공포까지도.. 응? 영화 주인공이 소린이다.. 리처드 아미티지.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읽을 때 거사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혀왔다. 이토 히로부미가 육중한 기차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플랫폼을 걷는다. 권력자를 맞이하는 환영 인파 사이에 철저하게 홀로 안중근이 있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일신의 안녕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문을 통과한다. 물론 그런 의식조차 없이 자기 자신이 총 자체가 되어 표적을 겨냥한다. 부산하게 나부꼈을 깃발과 그날의 공기는 정지된다. 표정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멈춘다. 오직 안중근 의사만이 '작동'했다. 저격 장면은 의사 본인이 기록한 자서전이 가장 인상적이다. 홀로그램 체험도 이 같지 않으리.


시아버지는 복숭아 농사를 짓기 위해 어린 나무를 심으셨다. 첫 해에 앙증맞은 복숭아가 맺혔다. 과일나무는 해거름도 있다고 들었다. 3년 이상 잘 돌봐야 상품성 있는 과실을 얻는다고 한다. 지난 여름에는 복숭아나무 사이를 허리를 굽혀 훑으며 열매를 수북하게 얻었다. 줄기에서 가까운 가지에 있는 복숭아는 미리 따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수확 시기에 제대로 된 탐스런 결실을 얻는다고.


겨울, 동지를 지나고 눈을 여러 차례 맞고 말끔해진 가로수를 내다본다. 철저하게 앙상하다. 잔가지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핏줄에 대하여 생각에 잠긴다. 혹은 영혼의 축적(?)에 대해서도. 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내 눈앞의 귀여운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에게. 나는 내가 물려받았을 위험한 광기를 비커에 담긴 자줏빛 투명한 액체처럼 바라본다. 판타지의 영향인가 보라색 물이라니. 나는 비커 안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나를 바라본다. 나의 단점들 내게 결여된 부분을 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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