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순수의 시대>
2015년 작품 <순수의 시대>를 2020년에야 보았습니다. 포스터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짐작하건대 정치 액션물처럼 보였어요. 남자 세 명의 남다른 눈빛이 강조되어 있었으니까요. 막상 감상하고 나니 그 눈빛을 한데 모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모란꽃 같은 그녀, 가희입니다. 가희 역의 강한나 씨는 이름만큼 당찬 배우였어요. 씨네 21 인터뷰를 영화를 본 후 읽었는데 촬영이 끝날 때마다 작업일지를 남기신다고요. 글씨가 아주 꼼꼼하고 정돈된 느낌이었습니다.
순수한 눈빛의 첫 번째 남자, 이방원 역의 장혁은 복잡한 내면을 감춘 맹수의 아우라를 한껏 보여줍니다. 흐느적거리는 듯 하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실리고 사람이 모이게 하며 상대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의 부친조차 맘 편히 곁을 내줄 수 없는 아들, 왕이 되지 못할 운명을 부수는 왕자의 역할을 소름 돋게 표현해요. 영화는 그런 방원이 누군가와 동침하는 화면과 북벌 전장에 나가 싸우는 김민재 역의 신하균을 교차로 보여줍니다. 영화 시작과 함께 화면을 채운 베드신은 인물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장치처럼 징검다리 놓아지듯 이어집니다. 방원의 공격적인 눈빛에 포커스 된 베드신은 캐릭터를 빠르게 안착시키는데, 그가 단순히 여인에 대한 욕정이 가득한 가벼운 인물이 아니라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위험한 계략을 품고 있음을 짐작하게 돼요.
그에 반해 태종의 부마가 된 김진 역의 강하늘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흥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요. 왕족에 버금가는 그의 신분은 약자를 유린하고도 제재받지 않기에 그의 공격성은 폭주하는데요. 유약하기에 잔인해지는 악마성을 강하늘 씨가 너무 훌륭하게 연기해서 배우의 연기폭에 감탄하였습니다. 강하늘이 연기하는 부마 '진'은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책임질 기회조차 박탈된 캐릭터지요. 어린아이가 잔인해질 때의 눈빛을 담아낸 듯한 그의 연기는 배역이 험한 편인데도 '진'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잘 살려내었어요.
신하균 씨는 정지화면으로 담아낼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전장에서 그가 연기한 무사 '김민재'는 해야 할 일을 하는 투명한 눈빛을 보여줍니다. 그 건조한 눈에 아리따운 여인이 담기면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의 눈빛을 보여주는데 그런 익숙한 사랑의 감정을 새로워 보이게 하지요. 불에 타고 있던 뜨거운 노리개를 주워 연인에게 돌려주는 '민재'의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따뜻하게 녹은 눈매를 보고 있으면 연기력이 곧 개연성이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상대배우의 연기를 구슬 꿰듯 연결하는 강한나
세 명의 남자와 각기 다른 연이 있는 기녀 '가희'역 강한나 씨를 기대감 없이 보다가 점점 빨려 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진과 자리한 포목점에서 까르르 웃는 장면은 마력이 느껴질 정도였어요. 영화 개봉 당시부터 화제였다는 베드신에서 노출에 대한 부담을 잊고 몰입 연기로 화면을 장악하는 그녀를 볼 수 있는데, 강한나 씨의 인터뷰를 보면 사전에 잘 협의된 상태에서 연기 흐름에만 집중한 결과라고 합니다.
베드신이 등장할 때마다 감정선이 증폭되어 극의 절정으로 치닫는 긴장감 또한 팽팽해집니다.
진심은 복잡하게 얽힌 함정을 빠져나갈까요? 아니면 위력에 꺾이고 말까요.
연인을 물에 띄워 보내는 정한
세간 없이 호롱불 하나만 켜진 방에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겨진 듯한 밤. 민재는 가희에게 꿈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해하지 않고 모두 사이좋게 사는 화목한 곳에서 너와 내가 마주하고 웃고 있었다고 말이죠. 군주의 명령에 따르는 군인으로, 생명의 은인의 뜻대로 살던 민재는 자신이 품고 있던 원하는 삶을 연인에게 이야기하며 어떤 위협에서도 지켜주겠다고 약조합니다. 남녀가 뜻이 맞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합니다. 민재의 한결같은 사랑은 가희 안에 자라 있던 가시를 녹이고 두 남녀는 예정된 파국을 맞으면서도 이미 그 사랑을 다 이룬 듯합니다.
나루터에서 연인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정한은 영화 <동방불패>에서 영호충을 바라보던 임영영의 따라 걷는 걸음에서 충분히 느꼈는데, 그에 못지않은 감정이 깊은 우물처럼 <순수의 시대>에 담겨 있습니다. 상대를 해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화로울 수 없을까? 엔딩에서 이방원의 흩어진 눈빛 또한 그런 감정을 설핏 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일지라도.
+ 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고 단편적인 감상을 혼잣말처럼 추가하는 표시입니다.
+ 손병호 씨의 태조 이성계는 가장 상상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자신과 가장 닮은 자식을 되려 부정하는 아비의 모습이 잘 그려졌는데 고려 복식이 남아있는 듯한 치렁치렁 귀걸이가 묘하게 생생하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에서도 손병호씨는 친자식을 멀리하면서 지인의 자식들에게 너그럽게 웃어주는 아버지로 나온다.
+장혁 씨는 잘생긴 얼굴에 도는 특유의 천박한(!?) 웃음으로 또라이같은.. 이방원을 연기했다. 영화<관상>의 수양대군 이정재처럼, 등장할 때마다 진심으로 무서웠다. 야생성이 살아있는 육식 동물을 맞닥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김민재 장군은 어린 시절에 잃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부인을 살갑게 대하지 못한 것 같다. 겉만 부부이지 민재는 수도승처럼 살지 않았을까? 기계처럼 싸우고 싸우고 싸우던 그가 이제는 쉬고 싶다고 했을 때 싸한 기분이 든 것은 자신을 소모시키는 삶을 살던 그에게 쉼은 곧 죽음으로 통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의 길목에서 그는 단 한번의 찬란한 기쁨을 만난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주는 사랑'을 통해 스스로 구원하고 연인 또한 복수의 불구덩이에서 구하게 된다.
+댄 애리얼리 <경제 심리학>에서 복수에 대한 챕터만 읽고 요약해 본 적이 있는데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갈무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하고 그래도 건설적으로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애매하게 마무리했었다. 미진한 느낌때문에 늘 마음에 담고 있던 이 질문을 <순수의 시대>를 보면서 풀어 보았다. 먼저 주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김민재라는 목석같은 사람을 보라. 그는 두껍게 봉인된 껍질 안에 순수한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 채 전쟁할 때만 그 힘을 불살랐을 것인데 포악한 터미네이터같은 그가 마음의 포문을 열게 되자 순간을 영원처럼, 주는 것인 행복한 로맨티스트로 탈바꿈한다. 어찌됐든 부인과 아들 '진'이 불쌍하다. 남편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정씨 부인은 아들만을 바라봤을 것이고 그녀의 외아들은 풍족하게 자랐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휘둘리는 허망한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