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로 이은 한국 근대사 100년

황석영 <철도원 삼대>를 읽고

by Gomsk

<철도원 삼대>를 택하여 진지하게 독후감을 써 보고 싶었던 것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립된 심리와 단절감을 확 트이게 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넓은 세계를 품고 있는 소설은 활동이 물리적으로 제한될 때 답답한 정서를 기댈 수 있는 그야말로 ‘비빌 언덕’이다. 작가는 담담한 문체에 흥을 실어 전래동화를 들려주듯 100년 동안 일어난 가깝고도 먼 이야기로 이끈다.


<철도원 삼대>를 읽으면 지난 세대의 수난이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가깝게 다가선다. 우선 영등포 등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공간을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등포에 살았던 나는 붉게 이어진 벽돌 담장과 대형마트 자리에 있었다는 방직공장, 철공소 거리와 함께 영등포 역사 건너 좁은 골목마다 뿜어 나오던 활기를 기억한다. 영등포에 S백화점이 기존 사창가를 에둘러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백화점 앞 광장에 직업여성들이 시위하고 있었다. 아직도 캡모자를 쓰고 구호를 외치는 뒷모습이 잊히지 않는 것은 서글프게도 약한 이들 앞에서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버티는 삶’자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백화점 광장에서 이뤄진 시위 또한 노동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이의 꿈틀거림이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혼란했던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이 소설 말미에 등장한다.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 들어선 미군정에 의해 쌀을 빼앗기고 결국 거리에 나선 시민들은 공권력 앞에 무참히 희생된다. 연고가 있는 고장인지라 그 현장을 연상하며 짚어보게 되었는데 호열자(콜레라)전염을 방지한답시고 미군이 통행금지령까지 내렸다니 배고픔에 생존을 위협받은 사람들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참담함에 착잡해진다. 노동의 대가는 온당한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고 왜곡된 세상 흐름에 따라 시름을 만들어낸다. 노동자가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당연한 싸움은 자본과 권력에 의한 위력에도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얼룩처럼 스며든 슬픔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일까. 세상사 겉이 바뀌어도 그 속은 같아서 무엇이든 발전하여 풍족해진 오늘날 에도 곪은 사회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괴로움을 헤쳐 가는 인간의 삶은 그대로인 것이다.


이진오는 50대 노동자이며 현대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젊은 날 줄곧 일해 왔던 회사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기존 노동자들은 해고 위기에 몰린다.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한 정당한 권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는 45미터 높이의 굴뚝에 오른다. 이진오는 홀로 농성 중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빈 페트병에 그리운 이름을 적는다. 이름이 적힌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지만 진오 곁에 불현듯 나타난다. 세상 흐름에서 벗어나 정지된 공간인 굴뚝 위에서 진오가 만나는 과거의 사람들은 그의 현재를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의 시점에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닿아있는게 아닐까 싶다.


안개 낀 어느 날 지상에서의 삶과 멀어진 굴뚝에 진오의 할머니가 찾아오고 그가 어린 시절로 일순 회귀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진오에게 ‘시언하게’ 물 말은 밥에 굴비를 얹어주는 다정한 할머니는 <철도원 삼대>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많은 일을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할머니 '신금이'는 진오 할아버지 '이일철'의 아내, 아버지 '이지산'의 어머니이고 철도원 일대에 해당하는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연결점에 항상 진오 할머니 '신금이'가 있다.


소설의 재미는 각 등장인물마다 이야기를 소상히 풀어내는데서 배가된다. 진오 할머니 신금이는 아들 많은 중산층 농부의 귀한 막내딸인데 보통학교 졸업 후 영등포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학업을 잇는다. 그녀가 남편감을 공장 독서회 활동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누구에게나 빛나는 젊음이 있음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작가의 손길에 솜씨 좋게 엮여 소개되는 촘촘한 이야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겪은 옛날일이 아니라 그 시대 청년들이 겪은 청춘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다른 세대가 살았던 시절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일철과 결혼하여 아들 이지산을 낳은 그녀의 삶은 운동권 '동지'인 시동생 이철과 그의 아내 여옥과도 꿰어진다. 일제 강점기 철도학교 졸업 후 기관수로 앞날이 탄탄대로였던 형 일철과 달리 동생 이철은 영등포 공장지대에서 기술자로 일하며 험난한 항일운동을 이어간다. 공산주의자로서 영등포 지역 노동자들을 이끌던 이철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교도소에서 옥사한다. 온건하고 단정하였던 일철은 동생이 죽은 이후 자신도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는 철도학교 재학시절 자신이 집안을 책임지는 대신 동생이 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는데 이는 이철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용히 지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철이 일제강점기 사상운동을 했다면 형 일철은 해방 이후 조직된 노조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미국과 소련의 완력싸움으로 한반도는 무간지옥이었다고 한다. 일정 때도 없던 무자비한 살상 진압이 동족 간에 일어나 개인의 삶은 더욱 피폐해진다. 이쯤 되면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는 어찌 그 세월을 견디셨는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진오의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은 일제 강점기 철도 기술자로 평생 일했으며 할아버지 일철은 중국까지 잇는 대륙철도 기관수가 되고 아버지 이지산은 해방 후 혼란시기에 군수물자를 나르는 기관수로 일한다. 삼대를 잇는 철도는 우리 역사를 꿰어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한데 그 철도를 오늘날 고속열차가 빠른 속도로 무심하게 오간다. 증기기관차가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오가던 때, 철도는 강제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의 눈물과 설움이 그 쇠(鐵)마디마다 스미어 있다.


기차에 한눈에 반했다던 이백만은 아내 주안댁에게 무심했는데, 진오의 증조할머니 주안댁은 그 이름자도 드러남없이 죽음 이후에도 가족의 수호신처럼 계속 등장한다. 죽은 이도 살아남은 가족을 떠날 수 없을 만큼 세월이 모질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산 사람과 죽은 이가 함께 자리하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과 정으로 이어져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일이 별다를 것이 없으니 하고픈 일을 하라던 신금이의 당부는 황무지에 맑은 물을 부어주는 것처럼 뭉클하다.


이진오가 굴뚝에서 내려온 후에도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지만 결코 헛되지 않다. 진오의 동료가 연이어 굴뚝에 오르는 결말에 미약하지만 희망을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철도원 삼대>는 작가 표현대로 급물살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다. 100년도 못 되는 시간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다. 2020년에 이르러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인은 또다시 역경을 맞았지만 결국 활로를 찾게 될 것임을 믿는다. 소설은 절망적인 시대를 살아낸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통해, 버텨낸 이들은 선대보다 한 걸음 나아가 미소 짓는 날이 온다고 분명한 진실을 말한다. -끝-



위 독후감상문은 2020년 제27회 영남일보 책읽기賞 응모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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