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듄>, 책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그리고 영화 <관상>
'듄'을 예전에 들어보았으나 그 뜻은 요즘 알게 되었다. 1999년 학생일 때 주어진 과제가 표지 디자인이었고 복도에 전시되었던 전체 과제물 중에 생소한 한 글자 듄이 우측 상단에 새겨진 우주 판타지 소설 표지를 기억하고 있다. 듄이란 뭘까? 작가가 만든 단어일 것이라 여기고 의미를 찾아보지 않았는데 시간은 훌쩍 이십여 년을 건너뛰고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비로소 의문(?)을 풀었다. 모래언덕. 사구. 듄. 모래가루가 스민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영화 포스터를 보고 그리움이 밀려왔고 그 감정은 청년시절 동경하는 마음으로 살짝 보관했던 씨앗을 44세에 갑자기 꽃으로 만난 듯한 갑작스러운 반가움이었다.
영화 듄은 묵직하면서 우아했다. 하얀 옷의 암살자들이 조용히 하강하는 모습에 탄식 같은 탄성이 나올 정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모래바람은 그치지 않아서 헐거운 내 내면 곳곳을 계속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상냥하고 낮은 소리로 혹은 쇳소리 나게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거대한 모래벌레가 듄을 가르는 호쾌한 엔딩 장면은 88세가 되어도 생각날 것 같다.
영화를 본 후 책장에 꽂혀 있던 <사막의 전사 투아레그족> 그림책을 보았다. 영화 속 햇빛에 깊게 그을린 푸른빛 도는 피부색을 가진 전사들을 보니 떠올라 찾아본 것. 관심을 가지게 되니 사막과 관련된 책도 눈에 띄었다.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여기에도 투아레그족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춤추듯 걷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것이구나, 새삼스럽다. 대비한 몇 가지 틀에 맞춰 일상이 흘러가는 듯해도 약간의 변수에도 흔들리는 게 인생이다. 인생이라는 사막은, 육아라는 사막은 아른거리는 지평선을 보여 줄 뿐이다. 뜨거운 낮에도 차가운 밤에도. 예기치 않게 선물 받는 빛나는 순간을 제외하면 언제 끝나는 길인지 알 수 없다.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느끼는 나는 누구일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나침반을 선물 받는다. 달의 자기장에 방해받지 않는 사막의 물건이었고 방향을 알 수 없을 때 꼭 필요한 귀중품이다. 나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인가? 나의 에너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모래폭풍 속에서 잠자리처럼 생긴 비행하던 날개를 접고 운전대를 놓아버리는 장면은 정말 아찔하다.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이, 물 흐르듯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움을 놓아버린다는 것이 순간의 용기로 이뤄진다. 제아무리 정교한들 거대한 기계는 하찮은(?) 모래바람에 부식된다. 인간의 자만심도 분쇄되어 버린다.
섬세한 물결무늬를 이룬 모래언덕이 이어지는 사막은 파도가 끊임없는 바다와 같다. 기세 좋게 굽이쳐 올라 이내 부서지는 허무할 새 없는 그 반복. 다시 꺼내 본 영화 <관상>에서 송강호의 시선으로 느낀 노을 진 바다가 사무친다. 송강호가 연기한 관상가 김내경은 세상을 보고 있다고 했다. 영화 중반까지는 김내경이 은둔의 사막을 벗어나 산을 오르는 모양새로 유쾌하게 흘러간다. 그는 출세하여 임금이 내린 임무를 맡고 그의 아들은 과거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다. 성공의 꼭짓점에 이른 것 같은 산 정상에서 수양대군이라는 더 높은 산을 맞닥뜨렸을 때 김내경은 비극을 향해 추락하며 부서진다. 다시 끝 모를 사막이다.
송강호의 두려움을 한껏 드러낸 표정 연기 덕분에 상대 캐릭터가 훨씬 두렵게 느껴졌음을 이번에 알았다. 그리고 개봉 당시 보았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가 내가 버틴 육아 십 년만큼 들여다 보인다. 장성한 자식을 잃고 수행하듯 사막을 건너는 김내경이 가슴에 담은 그 풍경에 지금의 나는 마음이 애인다. 솟구친 파도만을 보았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영화 대사처럼 나는 잔잔한 파도를 맞고도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그 바람을 느끼기 위해 공벌레처럼 숨고 싶은 두려움을 걷어낸다.
디스 이즈 온리 더 비기닝. 영화 <듄>에서 강인한 소녀가 확신을 담은 푸른 눈빛으로 전한 메시지는 지금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선언하며 이 글을 남긴다. 상황은 달라져도 나는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이 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