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포 가는 길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삶,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by Gomsk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후반부에 엄마 혜숙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이 지점부터 드라마 보기가 힘들었다. 여유롭게 즐기다가 뭔가 적극적으로 주워 담지 않으면 머릿속이 엉망이 될듯한 기분이었다. 느린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다가 감당할 수 있는 자만 보라는 듯 소용돌이쳤던 이야기를 빠져나와 소감을 남긴다.


이른 아침과 노을이 까무룩 넘어가는 저녁마다 30대 삼 남매는 노란 마을버스를 타고 경기도 외진 동네 산포에서 당미역을 오가고 전철 29개 역을 지나 서울로 출퇴근한다. 첫째 기정의 말처럼 밝을 때 퇴근해도 집에 오면 깜깜 해지는 산포 집에는 꼬장꼬장한 아버지와 부산하게 그들의 끼니를 챙기는 엄마가 있다. 유난히 밥을 먹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가족의 밥상을 반복해서 채우는 엄마 혜숙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발처럼 조용히 살림을 거드는 셋째 미정도.


등갈비 김치찜과 누가 다 먹나 싶게 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오이소박이, 구 씨가 좋아하는 고구마 줄기 무침, 싱크대 작업장을 바삐 오가던 오봉 위의 얼음 커피까지 빨간 날 없이 바쁘게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챙기던 그녀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도 밥을 안쳤고 트럭이 논두렁에 구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설거지 끝난 시간에 들이닥친 아들 친구들에겐 창문 너머로 비빔국수를 건넨다. 도저히 상냥한 모습 보일 수 없게 바쁘게 돌아가던 혜숙의 일상은 그렇게 고무줄이 탁 끊어지듯 멈춘다. 한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끼운 채 한자리에 편히 앉아본 적 없었을 엄마의 삶은 일손을 잠시 놓은 사이 허망하게 끝난 것이다.


혜숙이 죽은 이후 집은 생명이 꺼진 허깨비처럼 변한다. 미정이 제아무리 야무져도 채울 수 없는 엄마의 빈자리 때문에 결국 삼 남매는 서울로 거처를 옮긴다. 동화 <샬롯의 거미줄>에서 어미가 죽은 이후 탄생한 거미 새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의 삶을 향해 날아간다. 첫째가 마흔이 가깝도록 자식 모두 보듬고 있던 혜숙이 사라진 진공상태의 산포는 삼 남매를 그렇게 서울로 밀어낸 것이다.


서울에서 이직한 N카드에서 일하던 미정은 어느 날 툭 걸려온 전화를 받고 구 씨와 재회한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던 구 씨는 산포에서 지낼 때처럼 누그러진 표정으로 그녀를 대한다. 말없이 밭일하고 싱크대 만들면서 미정의 아버지 제호를 보필하던 그는 독주를 마셔야만 움직일 수 있는 기계처럼 마비된 상태다. 산포에서 혜숙의 집밥을 두둑이 먹고 물러나와 혼자 있는 동안 천천히 소주 두 병을 마실 때와 다르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되려 악랄하게 살아온 구 씨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백화점에서 큰 소리로 험한 욕을 끄집어 올리던 구 씨를 보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속이 욕지거리로 가득 차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그렇게 수금된 돈다발 세는 것을 지켜보는 구 씨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고 기력 없는 몸을 누이던 온기 하나 없는 오피스텔에 미정은 난로를 들여놓고 그와 함께 담요를 두른다. 마치 모닥불을 앞에 둔 것처럼 웅크린 공간 안에서 구 씨는 그녀에게 감추고 싶지만 하고 싶은 말을 힘겹게 토해 내고, 미정은 섣불리 그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조용히 미소 지으며 치즈 카나페를 만들 뿐이다. 그들의 대화는 서론이 없다. 미정의 말처럼 구 씨는 껍데기가 없는 투명한 사람이고, 구 씨의 말대로 미정은 그런 그를 압도하는 무서운 사람이니까.


미정은 길고 긴 출퇴근 시간 동안 자신 안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았고 상대의 심연 또한 두려움 없이 바라본다. 그런 그녀가 동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기엔 한참 거리가 있다. 미정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자기 자신을 숨기지만 결국 뚫고 나온다. 마지막 그녀의 환희에 찬 독백이 벅차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이르러야 할 경지다. '나 미친 것 같아. 나 자신이 사랑스러워. 느낄 게 사랑밖에 없다' 미정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추앙할 수밖에 없다. 추앙받아야 한다.


구 씨가 클럽 지하 사무실에서 마주친 아기처럼 인간은 사랑 그 자체로 태어난다. 정성으로 대하는 부모를 만나든 학대하는 부모를 만나든 아기는 세상 모두를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일그러진 사랑도 순수하게 받아들인 덕분에 자신까지 얼룩지더라고 모든 것을 환대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거미 새끼들처럼 세상에 흩어졌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혼자 다정해진다는 둘째 창희의 충만한 시간은 물질적인 대가를 비싸게 치러야 가능했다. 복잡한 술집 장부를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 매섭게 파악하는 구 씨 또한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타고난 기민한 감각을 깨울 수 없다. 그리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제호의 눈빛은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유순해진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시커먼 하늘에 달이 뜬 바람 부는 밤, 뿌옇게 휘날리는 갈대 사이를 수행하듯 오르던 미정처럼 끊임없이 질문할 것이다. 새로이 세상에 온 생명 보듯 나를 온전히 환대할 때까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미정은 초등 3학년 열 살 때 이미 목공에 분명한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조이 카드에서 봄에 출시할 새로운 카드 '스프링 부케'를 디자인했다. 이직한 곳에서는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카드 발급 업무를 맡고 있고 적성에 맞는 일이라며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다. 미정의 동료였던 보람의 말처럼 그녀는 사물을 기품 있게 그리고 오차 없이 창조하는 사람이다. 클럽에서 사람을 상대하고 돈 관리하며 욕지거리로 속이 가득 찼던 구 씨는 환대하는 삶으로 고통스러운 발걸음을 떼었다. 타인에게 반응하며 흘러가던 일상에 자기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삶의 동력이 켜진 것이다. 그들은 산포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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