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캐릭터를 낯설게, 배우 박병은
배우 박병은 씨는 서늘한 배신자 느낌을 잘 살려낸다. 창백한 얼굴빛과 어우러진 물기 어린 큰 눈망울은 다가가면 삼켜질 듯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빠져들게 되는 묘함이 있다. 영화 <황해>에서 그는 짤막한 등장만으로 앞서 등장한 모든 캐릭터들의 난장을 소거시킨다. 고기를 뜯던 굵은 뼈를 휘두르던 면정학과 분당으로 차를 돌린 사장님도 내복 바람에 추궁당하던 애처로운 젊은이도 모두 삭제된다. 내게는 그랬다. 같은 증상(?)을 <킹덤: 아신전>에서도 겪었다. 눈보라 치는 북방에서 흔들림 없이 "저 아이를 거두라."던 차분한 무관은 속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처참하게 위기 속으로 보내버린다. <암살>에서 일본군으로 등장한 그는 어떠했나? 경성을 향하는 기차 객실에 앉아 우아하게 핸드크림을 바르는 동작만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국민학생일 때 읽었던 소설 <마루타> 속 섬뜩한 일본 장교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받을 정도. 그래서 영화든 드라마든 박병은 씨가 등장하면 평범한 역할일지라도 곧 뿜어져 나올 무언가에 긴장하게 되는데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그는 자율사립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수학 선생님.. 수학 선생님이 어떤 존재인가? 나는 아직도 8일, 18일, 28일이 두렵다. 8번이었던 나는 "오늘이 며칠이지?"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의 멘트가 떠오르면 아직도 명치가 조여 온다. 내 번호가 걸리는 날짜에 교과진도에 있는 문제를 미리 달달 풀어놓았다가 칠판에 그대로 복사하듯 적었던 십 대의 여러 날들 때문에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런 수학 선생님 역할이라니. 월남한 수학자(최민식 분)와 한부모가정의 고등학생이 벽돌로 지은 고풍스러운 과학관에 우아한 조명을 여러 개 밝히고 수학의 아름다운 진리를 탐구하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뒤집을 거 같은 고요하면서도 팽팽한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학 선생님과는 어떻게 풀릴까?
영화 결말에 이뤄지는 재회는 수학 선생님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살려낸 박병은 씨 덕분에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