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를 보고
훌륭한 해설이 많이 나와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줄거리 요약 없이 결말을 포함하여 씁니다.
<파묘>의 여운을 즐기기 위해서.
700만 관객수를 향하는 시점에 최대한 사전정보 없이 <파묘>를 보았다. 수요일 오전이었음에도 극장 1관에 꽤 사람들이 있었고, 앉은 좌석과 가까운 자리에 나보다 연배 있는 분들이 보였다. 덕분에 영화 보는 내내 작은 즐거움이 카푸치노에 끼얹는 시나몬처럼 더해졌는데, 뱀이나 '험한 것'이 등장할 때 깜짝 놀라기보다 느긋하게 쫓아버리는 소리를 내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반응이 괜찮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는 재미가 있었다.
<파묘>는 눈에 안 보이는 무언가가 곁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위협적일 수 있다는 공포감을 자극한다. 하지만 범죄에서 비롯되는 두려움과는 다르고, 인간의 근원을 건드린 데서 오는 감정 같다. <파묘>는 무서운 이야기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전래동화를 할머니 무르팍 베고 듣는 두근거림이 있다. 그래서 극장을 나설 때 가장 인상이 강렬했던 것이 '도깨비불'과 그것에 압도된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어릴 때 읽은 옛날이야기에 등장했던 도깨비불은 귀여운 쪽이었다. 그래서 풀숲에 반딧불처럼 어른거리는 주먹만 한 불빛 일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도깨비불은 압도적이었다. 극장 사운드 덕분에 불덩이의 중량감이 꽉 조여맨 붕대처럼 가슴팍을 압박했다. 홀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일본 도깨비불이라는 점이 낯설었다.
영화에서 무당 화림(김고은 분)이 일본 도깨비를 '정령'이라고 설명한다. 정령... 정령은 예쁘지만 표독한 면도 있고 친절할 수도 있지만 사람에게 약간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가? 한국의 귀신과 일본의 귀신에 대하여 어린이 이야기책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문득 일본에 캐릭터 산업이 방대하고 깊은 건 그 나라만의 문화에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에 정념이 더해져 요괴가 된다는 설정으로 일본에 대한 흩어진 인상이 하나로 모아진 것이다. 그러자 피칠갑을 한 채 물고기를 생으로 아득아득 씹는 일본 도깨비가 덜 무서워졌다. 감독이 의도한 연출 방향일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맺힌 마음은 누군가 꼭 풀어주어야 한다는 명제가 선명해졌다. 은어와 참외를 준비했냐는 사무라이 도깨비의 엄숙한 말이 안쓰러웠다. 원하는 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모르기도 했고, 화림이 은어만 잔뜩 줄 때 의아하기까지 했다. 참외는 왜 안 줄까. 안 준다고 더 화내면 곤란하지 않을까.
후반부에 등장한 일본 도깨비보다 무서웠던 건 세로로 깊게 박혀있던 3미터 가까운 검은 관이었으며, 그 관보다 소름 끼친 것은 검은 머리털 달린 뱀이었다. 영화를 볼 때는 뱀 아래에 시신이 관도 없이 수백 명 매장된 것을 상상했으며 그 원혼들의 머리털을 뱀이 물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그것은 여자 머리를 한 뱀 요괴라고 한다. 요괴... 정령보다 더 뚜렷해진다. 일본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반응하는 감성을 지닌 것 같다. 사람이 거듭 생각하는 건 현실에 나타날 확률이 높아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토토로> 역시 요괴가 잔뜩 등장한다. 돼지가 사람 대신 희생되는 점도 유사하고, 귀엽게 표현되었지만 토토로와 까만 먼지들, 고양이 버스의 생김새 역시 약간 괴기스럽다. 캐릭터가 인간의 상상력이 생명을 부여해서 세상에 드러나는 거라면 요괴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후반에 튀어나온 일본 도깨비의 등장이 생뚱맞긴 해도 흥미를 잃지 않았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탁자 위에서 춤추던 미녀가 갑자기 변신할 때처럼 당황했지만, 괜찮았다. 한국 귀신과 일본 귀신이 한 곳에 있었다니 기막힌 이야기다. 파고들면 무엇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수긍이 되었다. 그래서 주점 깊숙이 숨겨진 뒷문으로 조지 클루니가 탈출할 때 그토록 열광했던 것이다... 황혼을 지나 검은 밤이 찾아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토록 흥분되는 이야기 구조가 있을까! 두 영화 모두 긴장감을 차근차근 높여가다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흐름을 꺾어 급물살을 탄다.
영화 초중반까지 서서히 극단으로 몰입하게 한 할아버지 귀신은 관뚜껑이 열리자마자 미국에 나타난다. 귀신이니까 당연한가? 후손이 창문을 열어줘야 입장할 수 있지만 이 순간 이동력은 무엇이람. 물질세계에서 생활하는 살아있는 사람에겐 소름 돋는 일이다. 육신을 떠난 혼은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지점에 바로 나타날 수 있나 보다. 산 사람은 비싼 요금을 치르고 비행기에 몸을 실어 이동하지만 귀신은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날 수도 있는 듯하다. 대신 이승에서 삼킨 음식은 '춥고 배고팠고 외로웠던' 원혼을 달래줄 수 없다. 자손을 모두 데려가려는 이기적인 귀신을 보자니 경멸하는 마음이 일어나 무서운 마음이 더 커지지 않았다. 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렸고 후손들이 어마어마한 부자로 살게 했지만, 결국 아들과 손자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거두는 혹독한 값을 치른다.
묘를 파헤치는 짜릿함은 불온한 것이다. 게다가 여우가 살고 있는 괴괴한 산중이다. 무당의 서슬 퍼런 굿이 아니라면 첫 삽을 뜰 엄두를 낼 수 없다. 진실은 첩장 되어 묻혀 있었지만 집요한 삽질로 드러난다. 왜 그랬었는지 시간이 흘러도 흩어지지 않은 단 한 가지는 무엇이었는지 남김없이 알려지고 화장되었다. 나 역시 마음속 무덤에 응어리진 것들을 담고 있다. 유한한 생을 살면서 조금씩 남긴 그 미련과 욕망을 파묘한다. 영화를 본 후 개운함이 일순 찾아온 까닭을 알겠다. <파묘>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한 살풀이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