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수술을 앞두고
올해 맞이하고 아빠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재력'에 대해 생각했다. 경제력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화두지만, 좁은 시야를 가진 내가 한 달치 생활비라는 담장 너머를 내다본 것이다. 평소 검소하게 생활하더라도 부자라면.. 이런 경우에 주치의에게 바로 검진받고 수술 날짜와 병원에 대한 선택도 자유로울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일흔 중반이 된 아빠는 아직 검은 머리가 많고 숱도 넉넉해서 젊어 보였다. 지난해 추석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추석과 설은 날짜 간격이 좁아서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사이 아빠는 폐암 초기 진단을 받고 혼자 병원을 알아봤다. 다큐멘터리 <하드코어 서울>에 나온 것처럼 아빠도 수서역에서 아산병원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원정치료를 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몇 차례 전화가 오가고 배우자가 나서서 아빠를 모시고 다녀오기로 한다. 그러다 먼 거리를 오가는 부담 때문에 사시는 지역 대학병원에서 수술하시기로 했다.
'아산병원에서 치료하셔야만 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혼자 빠져든 상념을 그대로 묻힌 채, 설날 오후 아빠를 보았다. 앞머리가 짧다. 아빠는 매일 아침 스테인리스 드라이기로 앞머리를 매만졌다. 평생직장을 은퇴한 이후에도 앞머리는 정교한 모양새를 유지했다. 더 이상 조끼에 은행 배지는 달지 않지만. 그 풍성한 머리칼에 점점 흰머리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아빠가 호통칠까 봐 장성한 자식들은 눈치를 보고 엄마는 몰래 아빠 흉을 보았다. 그랬던 아빠가 꽁지가 볼품없어진 비둘기처럼 앞머리가 앙상해진 것이다.
"병원에 있을 동안 불편하니까 짧게 자른 거야."
보름마다 이발소에서 조금씩 다듬던 아빠였는데. 아빠의 짧은 앞머리가 지금도 떠오른다. 아빠와 닮았고 아빠가 이해되는 만큼 나는 아빠를 무서워하고 미워했다. 바탕에 애정이 서로 가득한들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바라는 욕구는 채워지지 않은 채 아빠는 늙고 나도 나이 들었다. 그런 내가 나를 긍정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다. 원하는 것을 감추고 살아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하나하나 가려놓고 가면을 쓰고 살았다. 그게 자유롭고 너그럽게 자식을 키우지 않은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다. 예민한 아빠가 갑자기 화낼까 봐 무서웠던 기억을 자꾸 되풀이했다. 그 지루한 상영을 이제 그만할 때가 온 것이다.
아빠는 나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고 더 나은 단계로 끌어올려 살아낸 것이 맞다.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일 때 아빠는 삼 남매를 두었고 치매 때문에 시골에서 오신 노모를 부양하고 있었으며, 승진시험공부 중이었다. 그 시험에 불합격 통보받고 아빠가 밤새 울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 아빠가 나를 붙잡고 "공부해놔야 한다. 안 그러면 이렇게 너무 힘들다."라고 했는데, 그때 아빠를 통째로 적신 듯한 맥주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별로 좋지 않은 그 노란 냄새를 슬프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글은 아빠의 외모에 대한 소회이며, 외모(건강)가 일부 바스러지는 것에 대한 착잡함과 애틋함에 대한 것이다. 명절마다 아빠가 말끔하게 앞머리를 드라이한 것을 보고 안심하고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단 한 번 뿐이구나! 내가 아이였던 시간과 내 아이가 내 품에 안기는 시간도 모두 한정되어 있다. 아빠가 "못해준 것만 생각난다."며 나이 먹은 자식들의 이부자리를 봐준다. 올해 나는 아빠가 가고 싶어 한 백록담에 꼭 둘이서 같이 가야 한다. 시간의 모래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빠가 수술이 잘 되고 나으시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