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청소

안에 든 것을 내다 버린 날

by Gomsk

비워내고 여유 공간이 생긴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니 좋다. 오래된 식재료를 다 내버렸다. 내가 이것저것 구비해 두고 몇 해 넘긴 허브 가루도 쏟아내 버린다. 마치 토하는 것처럼, 토해내야 살 것처럼. 이제 냉동고 차례다.


생활은 개인 습관과 취향을 바탕으로 이어져서 내 입맛이나 조리하는 방식에 벗어나는 낯선 재료는 내가 망설이는 동안 썩는다. 바로 내놓지 못하고 묵히고 또 묵힌다. 불편한 감정도 같이 묵직하게 냉장된다. 홀가분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지. 문득 냉장고 문을 열고 선반을 보이는 만큼 닦다가 간장병부터 옮기고 물이 고인 채소봉지를 빼낸다. 부지런하게 움직였던 어느 날 다듬어놓은 당근도 상해있다. 부엌일이야말로 정교한 편집 기술이 필요하다. 살림하는 사람은 식재료 선택부터 보관 및 활용까지 식비 제한선 아래 부단히 식단을 편집해야 한다. 급식실 영양사 선생님처럼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서 머릿속이 바쁜 것인가? 아니 급식과 달리 집밥은 밥 하는 사람이 내키는 대로 메뉴를 정하거나 가족의 요청을 실시간 반영하기도 해서 이번달 급식표처럼 고정되지 않았다.


냉장고 청소가 이뤄진 날은 배우자가 아파서 앓던 밤이다.


담석증 진단을 받은 그가 먹을 수 있는 건 당분간 채소와 곡류뿐이다. 당분간 죽만 가능했는데 그날 저녁은 어묵이 들어간 된장국이었다. 그전에 크림이 들어간 빵을 간식으로 먹었다. 그래서 그날 밤 이후 주말 내내 사달이 났다.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았다고 통증을 참다가 재차 병원을 방문하고, 담낭 제거 수술일정을 앞당겼다. 그렇게 연이어 죽을 먹는 배우자는 내가 따로 차려먹는 저녁을 보며 맛있겠다 연발하며 농담을 한다. 다음날 저녁도 죽을 먹고, 기름에 부친 계란을 먹는 나에게 '자기도 먹을 수 있는 걸 먹는다'라고 웃는다. 같이 웃어넘기지 못하고 마음이 상한다. 벌써 지치면 안 되겠지만 지친다. 지난 9월은 배우자가 먹고 싶은 거 먹고 탈 나서 조심하고, 괜찮은 듯했다가 다시 아픈 날의 연속이었다. 나로서는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배우자의 농담도 농담으로 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아무것도 안 먹고 싶다.


냉장고 청소를 한꺼번에 하고 난 후 손가락에 상처가 났다.


부디 평정이 오길.. 내 몸이 무겁고 아랫배가 아플 땐 나도 나만 살피고 싶다. 이미 신경 쓰고 있는데 '더 잘했어야 했나, 나만 더 잘해야 하나'라고 해석한 순간 짜증이 솟구친다. 그런 게 아닐 거야... 서운하게 들린 소리는 나를 공격하는 게 아닌 것이야.. 무서워하지 말자.. 흘려버리자. 10월은 원인을 알고 맞이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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