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에 대하여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보고 프랑스 중심으로 유럽 근대사를 접하였다. 이 작품으로 나는 프랑스는 장미향이 나는 향기로운 땅이며 불길처럼 저항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겼다. 18세기 유럽은 이웃한 나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식민지 이권을 두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시대 배경을 보여주듯 스웨덴 군인 페르젠이 대포 64문을 갖춘 프랑스 군함을 타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는 근위대장 오스칼을 '자기의 사상을 위해서는 목숨도 거는 그런 사람'이라며 존중하지만 프랑스 왕실에 평생 충절을 바친 페르젠과 민중의 삶을 들여다본 오스칼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
오스칼이 백작 지위와 재산을 내려놓고 바스티유로 향한 날, 시민의 편에 선 위병대는 승리를 거머쥐지만 정작 그는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는다. 자유, 평등, 박애(이 만화에서 처음 들었던 단어)가 인류의 초석이 되길 기원하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전하면서.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는 결단력 또한 그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인가? 오스칼이 왕가의 군대에 속해있을 때 파리 신문기자 베르날이 '왕비의 개'라며 모욕했지만, 오스칼은 결국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득권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과 아침상이 푸짐하게 나오는 포근한 저택을 벗어나서 기아와 폭력으로 뒤숭숭한 파리 시내로. 자신의 군대와 함께 였지만 선두에서 지휘했던 오스칼은 홀로 광야로 나아간 위대한 개인이다. 개의 삶이 진실로 나쁜가? 개 같은 삶은 거칠고 가치 없는 하류인생을 빗대는 말이지만 실제로 개는 지고지순 하며 포기하지 않는 근성도 있다. 다수에 함몰된 개성 없는 인간이야말로 위험하다.
영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에는 18세기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군인 출신 벤자민 마틴(멜 깁슨 분)이 등장한다. 넓은 땅을 경작할 소작농을 둔 안정된 지주로 7명의 자녀를 두었던 부인과 사별한 것을 제외하면 평화롭게 살고 있다. 또한 목공에 취미가 있어 안락의자를 만들지만 앉아보기 무섭게 다리가 무너지자 어린 딸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분노를 폭발시키며 산산조각을 낸다. 그의 사나운 성미는 상자 안의 도끼처럼 감춰져 있다가 아들 토마스의 죽음으로 봉인 해제된다. 벤자민은 좁은 길목에 잠복했다가 영국군 행렬을 기습하고 도끼를 휘두른다. 이후에도 애꿎은 희생자가 생길 때마다 정당방위처럼 무기를 들지만 그의 복수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영국 대령 태빙턴처럼 무차별적이다.
독립을 위함이든 식민지에서 거두는 세금 때문이든 전쟁이 치뤄지는 방식은 괴상했다. 토마스가 아끼던 장난감 병정처럼 군인들이 벌판에 좌우로 길게 도열하여 드럼 소리에 맞춰 행진한다. 군인 개개인은 제국의 세력을 보여주는 일개 병정으로 존재하고 대포알이 날아와도 대열을 이탈하지 않는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다. 오솔길을 막아선 마틴과 그의 민병대를 향해 "이 길은 여왕의 길이니 비켜달라." 명하는 영국인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니다. 옮기던 짐을 버리고 일단은 달아났어야 했다. 서둘러 항복하는 이도 있었고 관대했던 장교도 있었으나 영국군을 상징하는 '빨간 코트'는 그들 모두를 적으로 묶어버린다.
무리수처럼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은 벤자민과 태빙턴 두 사람이 사생결단을 낼 동력을 끌어내지만 복수는 의미 없이 확대될 뿐이다. 벤자민이 토마스의 복수를 위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섰을 때 그는 폭력을 대물림한 셈이 되었다. 바닷가 마을에 은신한 아이들과 단란한 가정을 복구하지만 과거에 프랑스군과 연대한 체로키 인디언을 학살한 죄를 아내와 두 아들을 잃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 것만 같다. 오하이오 땅을 탐낸 태빙턴은 집단의 룰을 깨는 돌발 행동을 보였으나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했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었지만 그가 차지할 안락한 여우굴은 없다. 여담으로 태빙턴(제이슨 아이작스 분)의 목소리와 눈빛은 정말 '여우' 같다. 오히려 벤자민은 온순해 보이지만 화나면 위험한 곰 같지 아니한가.
나는 개 같은 인간인가, 여우처럼 사는 인간인가. 오늘 무엇을 할지 설레어 하기보다 노년의 삶을 걱정하는 내가 영민한 포유류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 개와 여우를 빗댄 인간의 언어에는 타인을 향한 질투와 열등감이 깔려있다. 개처럼 근성 있게 살며 소중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리라. 감당하기 힘든 날은 유머로 버텨내고 여우처럼 영리하게, 꼬인 삶을 풀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