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4천 년간의 방랑 : 영화 <맨 프롬 어스>
존 올드먼 교수는 짐을 싸고 있다. 10년간 역사 교수로 일하던 학교를 떠나는 날, 동료들이 존의 집을 찾아온다. 그의 집은 바위산이 낮게 둘러싼 황야 같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키 큰 선인장 사이를 지나 집안에 들어선 그들에게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존의 부싯돌 연장에서 튄 이야기 불꽃에 친구들의 질문이 이어지면서 활활 타오른 것이다. 가급적 빨리 자리를 털고 떠나려던 존은 조니 워커 그린을 꺼내고, 심경에 변화가 온다.
존은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만 4천 년을 살아온 남자를 소설 속 인물처럼 가정하고,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두가 지적 유희를 즐기듯 빠져들던 중,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생 린다가 동굴 벽화에 대해 묻는다. 존은 벽화를 그렸던 원시인, '기로르'와 그가 그린 <레지지 암반 벽화>를 떠올린다. 생존이 중요했던 선사시대에도 언어는 있었고 섬세한 예술 활동을 했다. 기로르는 관찰과 표현의 귀재였으나 사냥에서 수확 없이 공복 상태로 돌아온 족장에 의해 살해된다. 구석기시대 예술가의 최후는 참혹했으나 관찰자 존은 살아남았다. 수렵 채집하던 시절부터 쌓인 지식이 복리효과를 일으켰고, 온 생애를 걸쳐 호기심을 잃지 않았으며 위기를 영리하게 벗어났다.
존의 가구와 살림살이를 기부 단체에서 가지러 왔을 때, 박식한 동료들은 머리를 식히면서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지만, 결국 끝까지 듣고 싶어 한다. 동굴 같은 거실 벽난로 앞에서 이어진 존의 이야기는 감당할 수 없게 치닫는다. 장난기 많은 생물학자 해리의 두 눈에 눈물이 어리고, 독실한 크리스천 이디스는 신앙이 무너지는 혼란에 빠진다. 장엄하게 흐르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절정에 이를 때, 가장 연장자인 윌이 전기불을 켠다. 갑작스러운 밝은 조명에 모두 꿈에서 깨어나듯 깜짝 놀라고 이야기는 맥이 끊어진다.
호텔 로비나 객실에 들어설 때 느끼는 안락함은 섬세한 조명 덕분이고, 이는 모닥불을 피우면 안전함을 느낀 원시인의 심리가 남아서다. 타오르는 불 덕분에 맹수와 어둠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을 때 인간의 지적 활동이 꿈틀거렸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영감과 소용돌이치는 은하에 대한 직감도 모두 살아있는 불빛, 촛불을 바라보다 스쳤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온라인에 실시간 연결된 상태에서는 몰입과 깊은 사유가 일어나기 힘들다. 존은 윌과 대립할 때도 침착하고 눈빛이 아득한 밤하늘처럼 무심하다. 사람들의 짧은 생이 반복되는 것을 긴 세월 보아왔으므로. 그러나 모든 인연은 단 한 번뿐이다. 마지막 순간 윌은 자신을 '칠리 윌리'로 부르는 아빠와 재회한다. 많은 것을 남겼다는 존의 다급한 위로가 부질없다.
존의 이야기를 학구적으로 해석하며 빠져든 인류학자 댄은 상자 속에 든 상자에 갇힌 느낌이라며 괴로워한다. 그는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집에 가서 '스타트렉'을 보기로 한다. 견고한 내면의 세계가 깨어졌지만 댄은 안전한 느낌을 되찾고 싶다. 그는 어두운 도로에서 차를 멈추고 존이 넘겨준 부싯돌 연장을 만진다. 의문이 꼬리를 물며 찾아오겠지만 새로운 10년의 삶을 찾아간 존을 다시 만날 수 없다.
영화 <맨 프럼 어스>는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느낌으로 끝맺는다. <지구를 지켜라> 마지막 장면은 줌 아웃되는 지구를 보며 빠진 턱이 아직도 그대로(!)일 정도로 충격적이다. 알아볼 눈이 없다면 진실이 영원히 매장될 수 있다. 존은 단순한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복잡한 기록을 남기는 권력을 꼬집는다. 그의 100자 성경은 간결한 문장의 실천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