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유리한 신호만을 접수하라
꽃을 맴도는 나긋한 날갯짓이 아니라 불빛이라면 사정없이 달려드는 날개 달린 곤충이야말로 여름을 알린다. 방충망도 거를 수 없는 작은 벌레들은 형광등 안쪽과 노란 스탠드 주변에 몰린다. 다음날 대부분 죽어있는 그들을 무심히 쓸어버린다. 도대체 왜 불빛에 몰리는 걸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우미양가를 고르게 받은 성적표를 들고 여름방학을 맞이한다. 책가방에는 탐구생활이 들어 있다. 어린이는 여름방학 동안 할 일이 정해져 있다. 효율적으로 반 평균을 높게 유지하는 교육에 길들여지며, 선생님의 표정을 간직한 채 방학을 보낸다. 넌 아무개보다 나은 녀석이라는 신호를 읽었다면 그 은밀한 우월감에 즐겁다. 서서히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하기보다, 경쟁 시스템 안에서 우위에 서있을 때 받는 안정감에 도취된다. 그럭저럭 열 살 언저리까지 잘 유지된다. 문제 풀이에 높은 사고력이 필요한 수학을 만나기 전까지 평탄한 시절을 보낸 것이다.
'국민학교' 3학년 산수 시험이 끝나고, 손바닥이 큰 담임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옆자리 친구와 명랑하게 떠들고 있던 나는 "1개 틀렸어요." 대답한다. 다음 순간 선생님은 내 오른쪽 뺨을 날렸다. 그날 나는 반에서 본보기로 맞았다. 1개가 아니고 더 틀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크게 일그러졌다. 점수가 떨어지면 가치가 떨어지는 공포를 느낀 것이다. 거슬러보면 1학년 때 80점 받아쓰기 시험지를 학교 앞 문방구에 있는 갈색 고무통에 버린 기억도 난다. 재시험 보고 100점 받은 시험지만 엄마에게 보여주었고, 엄마가 잘했다고 얼굴에 뽀뽀해 준 그 표정이 너무나 선명하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노랫말을 아주 혐오했다. 나를 교회로 이끌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처럼 느꼈으나 겉으로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 교회는 잘못이 없다. 노래는 틀림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람은 사회에 나갔을 때, 그 사회가 아주 작은 규모일지라도, 꺼져가는 건전지 혹은 비눗방울 같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쉽게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힘을 말하고 싶다.
26세 사회생활 3년 정도일 때 나는 옮긴 직장에서 3개월 만에 해고 통지를 받았다. 그때 받은 부정적인 판결은 이전부터 갖고 있던 낮은 자존감에 더해 똘똘 뭉쳐졌다. "당신은 기대한 만큼 실력이 없으니 계약 해지를 하겠다. 만약 한 번의 기회를 더 원한다면 지금 급여의 절반을 감당해야 한다." 그날 나는 걸어서 귀가했다. 동호대교를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 어떻게든 입성하려고 했던 서울이며 강렬하게 원했던 강남, 그것도 청담동에 있는 회사가 아닌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도심 불빛이 함께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날 나는 바로 쫓겨났을까?
동호대교를 건너는 동안 유년기에 외할머니에게서 받은 절대적인 사랑이 소환되었다. 여름방학 동안 외할머니 곁에서 온전히 누린 시간은 자연과 함께 였다. 밀가루 반죽 같은 논바닥을 맨발로 느끼며 논에 고인 맑은 물이 쨍한 햇볕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 그림자를 어지러울 때까지 한참 바라보았다. 떠다니던 거머리가 내 발목에 달라붙기 직전까지. 따닥따닥 구워지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던 아궁이를 살피는 외할머니 옆구리에 바싹 붙어 앉아, 불길이 나를 향해 날름거리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생한 시골 저녁 내음을 통째로 저장했다. 우물가 앵두의 탱탱함과 마을 경계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한 오래된 나무의 두려운 실루엣까지. 왜 새빨간 노을이 숯처럼 까맣게 모습을 감추는 모든 것 사이에서 나를 응시할 때, 박완서 선생님의 말처럼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처절한 비애를 어린애가 느끼게 하는지. 모든 것을 온전하게 흡수했다. 자연은 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 무심하고 넉넉한 품에서 나는 평생 쓸 맷집을 충전했다. 지금 내 나이 즈음 이셨을 외할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건 100퍼센트의 사랑이고, 그런 사랑을 받은 나는 삶에서 함부로 물러나면 안 되었다.
나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급여를 받아들이며 회사에 남았다. 민폐가 아니었냐고? 어쩔 수 없었다. 그 지점에서 물러나면 나는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은 위기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텼다. 계약 해지하겠다던 회사 간부는 다시 3개월 후에 급여를 원래 수준의 80퍼센트로 복구시켜 주었다. 이후 상승곡선을 가파르게 올라갔다면 멋지게 포장할 수 있을 텐데 말 그대로 평범한 수준으로 살았다. 잘리지 않을 정도로 가끔 반짝이는 결과를 내면서.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수많은 신호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너는 잘한다. 너는 못한다. 너는 하지 마라. 안된다. 아무래도 제재하는 사회적인 신호가 많다. 칭찬할 경우에도 어른이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아이는 꿰뚫어 본다. 그래도 칭찬은 필요하다. 학교에서 과목별로 평가가 이뤄지는 환경에 있으면,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모든 아이들은 '나'를 제대로 알기 힘들다. 정확하게 내리꽂는 칭찬이 계속 필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능력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하는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켄 블랜차드 <1분 경영수업>
회사 간부는 경영을 위해 냉철한 판단을 한 것이다. 애초에 나에게 수치심을 안기고 쫓아내고 싶었더라도, 삭감한 월급으로 고용을 유지할 정도는 되었기에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고마운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부정적인 신호에 갇혀있었더니 괴로웠다. 그러나 타인의 평가가 담긴 신호를 전부 흡수한 것은 나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모두 내가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타인의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삶이 이어졌는가? 날벌레 앞에 놓인 도시의 수없이 번뜩이는 불빛처럼, 생존에 유리한지 위험한지 성장하게 할지 도태되게 할지, 나를 향한 미지의 신호가 세상에 가득하다. 나는 경쟁사회에서 우위에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는 곳으로 제 발로 뛰어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적 동기가 강했다면, 눈앞의 강렬한 가로등이 아니라 삶을 탄탄히 가꿀 수 있는 달빛 같은 지점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진짜가 있는.
나는 왜 익명 상태로 이곳에 계속 글을 쓰는가? 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인생의 무언가를 찾고 싶다. 그 욕망의 본질 정중앙에 꽂히는 승리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 시스템 안에서 적응할 때 부여받는 적당한 만족에서 튀어나오고 싶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과거에 겪은 지질한 경험에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를 발목 잡는 모든 부정적인 신호를 차단한다. 아! 벌레의 삶을 하찮게 본 내가 어리석다. 불빛을 향하는 날벌레의 집념만은 꼭 새기리. 나는 내 삶에 긍정적인 신호만을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