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 용의 출현 - 배우의 눈빛 열전
거센 물살을 일으키는 투명한 눈빛 - 박해일
<남한산성>에서 인조 임금은 대립하는 두 신하를 내려다본다. 중지를 모으기 어렵다. 시원하게 딱 떨어지는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불만이 일다가 사그라든다. 배우의 맑은 눈빛 때문이다. 온통 신경이 날 서있는 예민한 속내를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로 식힌다. 뜨거운 숯이 담긴 화로에 손을 덥히고 김이 오르는 수라상을 받아도 밉지 않다. 기대하는 바에 미치지 않아도 연민을 느끼게 하는 연기는, 강렬한 색조의 두 배우 김윤석 - 이병헌 사이에서 담백한 색감으로 존재한다. 배우 박해일의 투명한 눈빛은 상대의 의도를 비추면서 자신의 감정은 깊이 감춘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 용의자인 박현규가 터널 속 어둠에 묻힐 때,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가 느꼈을 착잡한 울분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공유되었을 것이다.
<한산 : 용의 출현>에서도 무언가 그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으나 표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전장에서 전투에 몰입한 눈빛이 놀라웠다. 완벽한 집중! 충무공과 배우가 합체된 것 같다. 전법에만 깊게 몰두했기에 꿈에서도 장군님은 전쟁을 치른 것이리라. 말을 타고 힘차게 전진했으나 성채가 가로막는다. 성벽은 그 유명한 학 날개 모양으로 압박하며 솟아오른다. 필승 의지에 따른 스트레스로 악몽을 꾼 것처럼 보이지만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에 어제도 했던 생각이 몰려와 웅성거린다. 골똘히 고민했던 과제 때문에 끙끙대다가 문제의식을 안고 잠든 사이, 잠들지 않은 '나'는 해파리처럼 무의식을 헤맨다. 그렇게 아이디어를 쥐어짜다가 선잠이 들었을 때 영감이 번뜩인 경험이 있다. 아이디어는 섬광처럼 금세 흩어진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에 적어야 한다. 물론 학교 숙제를 해결한 것과 충무공이 짊어진 국책..과제는 무게가 다르다. 공세에 나섰다가 실패할 경우에 대해 원균이 부정적인 신호를 난사할 때도 충무공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예 차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직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궁리하고 계셨을 테니. <난중일기>는 자기 계발서의 정수일 것이다. 무슨 방도가 있을 거란 예상조차 걸 수 없을 만큼 충무공의 눈빛은 고요했다.
미동 없는 바다 같은 충무공의 눈빛이 일순 반짝이는 장면이 있다. 학익진을 그리며 휘하의 장수를 배치할 때다. 믿음직한 동료들, 그들의 이름자를 써서 진을 완성한다. 그때 승리를 확신했을 것 같다. 아이처럼 설레어하는 장군의 모습은 전작 <명량>의 충무공과 대비된다. 명량 대첩을 앞둔 충무공(최민식)은 여전히 카리스마 있고 굳건하지만, 수많은 동료를 잃고 본인도 고초를 겪은 이후였기에 눈빛에 상실감이 비쳤다. 전투를 거듭 겪으면서 내상을 입은 심신에 갑옷 같은 딱지가 앉은 것 같았다. 미래(?)를 먼저 보고 왔기에 <한산>에서 충무공이 부산까지 치고 나가는 저돌적인 모습이 신나고 통쾌했다.
경계를 오가는 야생의 눈빛 - 김성규
투명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충무공에게 반항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항복한 왜군이다. 포로로 잡혀와 고문받는 장면이 나오자 불편해진다. 어서 바른대로 말해요! 그러나 맨 정수리에 장발이 흐트러진 사내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배우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던 준사(김성규 분)는 맨살이 인두에 짓이겨지는데 기이한 웃음을 터트린다. 그 상황에 자기 목숨을 쥐고 있는 권력자를 들이받는다. 미친 자가 아니라 충무공이 짚은 대로 '다른 뜻'이 있었다. 그는 나라와 나라의 싸움인지, 의와 불의의 전쟁인지 묻는다.
<킹덤>에서 김성규는 코 앞에서 좀비를 상대하는 역할이었다. 불길한 기운을 가장 먼저 감지한 야생 동물처럼 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긴장이 서려있다. 한의원으로 몰려올 좀비 떼를 막기 위해 이미 피범벅 된 방어물 사이를 오가고 달구지 끌고 달아날 때 달라붙는 좀비를 낫으로 쳐낼 때, 연기가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실제 상황 같았다. 같은 이유로 <범죄도시> 무시무시한 장첸 옆에 있던 음산한 양태도 인상이 뚜렷해서 지금도 영화 배경인 동네 어딘가에서 양고기를 굽고 있을 것 같다. 김성규의 눈빛은 야성이 살아 있고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끈질기게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지렁이를 연기하거나(미안합니다..) 호랑이를 연기해도 같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한산>에서도 그는 강렬한 색실을 직물에 꿰듯 준사의 궤적을 선명하게 남긴다.
욕망이 팽창하는 눈빛 - 변요한
원균은 큰소리치면서 두려움을 감추지만 불안한 속내는 흔들리는 눈빛에 그대로 드러난다. 손현주 씨는 얼마든지 용맹한 장수를 연기할 수 있을 텐데, 캐릭터 용량에 맞게 조절한 느낌이다. 움츠러드는 원균과 달리 와키자카(변요한 분)는 최고의 명예를 쟁취하려는 야망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수십 척의 왜선을 몰고 충무공을 향하는 그의 눈빛이 욕망으로 이글거린다. 와키자카가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 전체를 든든하게 받친다. 다만 변요한 씨는 바탕이 부드러운 사람 같다. 와키자카가 무자비한 장수라기보다 용감한 귀공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와키자카와 대립하는 왜장 가토는 김성균 씨가 실감 나게 연기했다. 가토가 와키자카에게 날쌔게 돌진할 때 얼음장 같은 전운이 돌았다. 누구든 그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다(영화 속에서..) 모난 눈빛의 가토는 짧은 분량에도 긴장을 확 끌어올린다.
원균은 수세에 몰리고 가토는 탐욕스럽긴 해도 현상 유지하려 한다. 반면에 와키자카는 상대의 허점을 딛고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한산도 최전선에서 와키자카의 시선은 너무 멀리, 명나라를 향해 있었다. 충무공이 올 어긋남 없이 짜낸 치밀한 그물을 넘을 수 없었다. 결국 욕망에 휘둘리느냐 초월하느냐가 승패를 갈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