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하얼빈> : 말의 힘, 그 영향력
김훈 <하얼빈>을 읽었다. 한 사람이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이룬 결과인 아름다운 문장에 빨려 들었다. 가지런한 글줄에 엮어진 역사는 이루어지는 과정마다 긴박하여 읽는 내내 눈이 책에 달라붙었다. 백여 년 전 시간을 불러온 글은 거대한 자석 같다. 기자였던 작가가 과거 그 시대로 건너가서 쓴 것처럼 현장감을 전해서, 출판된 책이 아니라 거사가 일어난 당시 신문을 읽는 것 같았다. 밤새 읽어야 할 장문의 기사.
소설에 생략된 말 주머니는 후기에 기록된 사실을 확인하면서 채워졌다. 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품고 있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 재판 과정에서 오간 말의 기록은 무력 충돌만이 전쟁이 아님을 보여준다. 안 의사는 홀로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소설에 함께 등장한 동지 우덕순의 단순한 대응은 명쾌하다. 길고 긴 판결문이 읽힐 때 졸고 있었다는 것은 후세 인간에게 건네는 유쾌한 농담 같다. 그는 사실을 말했으니 더 말하지 않는다. 만들어낸 말로 자신을 꾸미고 복잡하게 방어하지 않기에 엄숙하다.
우덕순 지사는 확장할 필요 없는 '말'을 명료하게 고정시켰고, 안중근 의사는 조준선처럼 가늘게 열린 말할 기회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일본 천황 메이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손에게 시계를 선물한다. 황태자 이은에게는 제국의 시간이 주어진다. 안 의사는 자력으로 시간을 창조했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것이 그와 같을 것이다. 안 의사의 말은 작가 김훈의 설명처럼 총이 되어 시간을 갈랐고,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해리포터가 9와 3/4 승강장을 뚫고 들어갈 때 그것이 마법의 힘, 그러니까 외부의 포스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우 지사는 동갑인 안 의사의 마음의 힘을 느끼고 어려워했다고 소설에 나온다. 강력한 마음은 시간을 제어하는 것 같다. 평범한 인간이 마술처럼 여기는 진기한 일들은 어쩌면 그 힘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어마어마한 마음 안에서 말은 진동하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극미의 세계에서 격렬하게 운동하는 양자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말과, 안 의사에게 세례를 준 신부 빌렘의 말 또한 음성과 글로 옮겨져서 영향력을 미친다. 말은 마치 야생마처럼 말한 사람을 떠나 날뛴다. 혹은 맹렬하게 달린다.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서로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 그것은 단순 정보 교환이다. 그러나 말에 에너지가 실리면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완벽한 문장으로 엮어진 <하얼빈>을 읽으며 새겼다. 극적인 상황에서 침착하게 말고삐를 잡고 안 의사는 말한다. 듣는 자를 읽는 자를 조준하여 정확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말은 언제나 오늘, 살아 있다.
잠결에 떠오른 말을 손바닥에 적는 시늉을 하며 온전하게 깨어났을 때 기억하겠거니 기대했지만, 막상 이부자리를 털고 앉아 완전한 문장으로 떠올려보니 도로 백지상태다. 볼펜 잉크가 말라버린 것을 모른 채 한참 써 내려갔을 때처럼 허탈하다. 순간 잃어버린 문장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디쯤 가라앉아 버린 것일까? 무게 없는 감상은 금세 의식 너머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진, 이뤄진 말은 꺼지지 않고 거듭 살아나 내게 묻는다. 이제 어디까지 알아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