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의 은하수> : 감미롭고 생생한 고통, 실존
1972년 5월, 생기발랄한 남녀 대학생이 모여 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린 자작 연극을 축하하며 들떠있다. 그중 대본을 쓴 리처드(크리스토퍼 리브 분)를 응시하는 이가 있다. 그녀는 관객이 빠져나간 객석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다. 조용히 리처드에게 다가선 은발의 그녀가 금줄이 달린 고풍스러운 회중시계를 건네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다. "컴 백 투 미." 리처드는 잠시 의아해하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이내 휩쓸리고 의문의 노인은 자리를 뜬다. 풍성한 머리칼을 틀어 올린 고운 그녀는 숙소로 돌아와 리처드가 쓴 연극 팸플릿을 소중하게 품은 채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낸다. 라흐마니노프의 랩소디를 들으며.
8년 후 시카고에 있는 사무실에서 리처드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리처드는 극작가로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는 허탈해 보일까? 불현듯 휴가를 다녀온다며 무작정 나선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동료에게 그가 말한다. 연인이었던 쉘리와도 이미 헤어진 상태라고. 그는 위태로워 보인다. 어쩌면 창작 활동에 지쳐 그저 휴식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길을 떠난 리처드는 무심히 지나치려던 호텔에 즉흥적으로 들른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하얗고 거대한 '그랜드 호텔'로.
1박을 하려던 그는 호텔 전시관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보게 된다. 마치 그를 보고 미소 짓는 것 같은 여인을. 사진 속 여인에게 사로잡힌 리처드는 다음날에도 호텔을 떠날 수 없다. 결국 지역 도서관을 찾아가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자료를 찾는다. '엘리스 맥켄나' 그녀는 1912년 그랜드 호텔 호숫가에 있는 극장에서 공연했던 배우이다. 신비로운 여배우를 취재.. 하던 리처드는 그녀에 대한 책을 쓴 작가를 방문하게 되고, 그녀와의 강렬한 인연을 알게 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과 읽고 또 읽은 책을 그녀 '엘리스' 또한 좋아했다는 것을.
1912년 엘리스(제인 세이모어 분)가 그랜드 호텔에 묵었던 그날로 가기 위해 리처드는 시간 여행을 감행한다. 방법이 독특한데, 그 시대 옷을 차려입고 현재 물건을 모두 눈에 띄지 않게 치워야 한다. 그리고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며 스스로 세뇌시킨다. "나는 믿는다. 나는 지금 1912년 6월 27일 저녁 6시 그랜드 호텔 객실에 누워있다.." 진땀을 흘리며 메시지를 반복하는 리처드는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할 결정적인 조건이 있음을 간파한다. 내리꽂는 직감에 따라 호텔 별채 다락에서 1912년 게스트북을 열람한 그는 마침내 비밀을 푼다. 1912년 6월 28일 오전 9시 18분, 416호에 숙박한 자신의 사인을 찾은 것이다.
사진에는 무엇이 담기는가? 모두가 사진을 찍는다. 늘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쉽게 자주 남긴다. 그 사진을 얼마나 마음에 담고 기억하게 될까? 사진 속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찍었는지 그리고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미지는 관련된 모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카메라 밖에 있었던 사람의 마음까지 새겨지기 때문에. 리처드가 엘리스의 사진을 보는 모든 장면이 애틋하다. 그리고 엘리스의 미소는 리처드를 살게 하고 또 죽고 싶게 한다. 전망 좋은 객실 창가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던 그는 속이 텅 빈 사람처럼 눈빛이 변한다.
그녀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을 되뇌며 '시간을 건너간' 그는 살아있는 존재로 눈앞에 나타난 그녀에게 대담하게 다가섰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서 저돌적일 수 있는 걸까? 현실에서 리처드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1912년 6월, 엘리스를 만난 리처드는 소년처럼 순수하며 순정을 간직한 열정적인 남자다. 그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웠고, 선녀같은 엘리스는 그의 완벽한 뮤즈다. 리처드는 시간여행에 성공한 것일 수도 있고, 노부인에게 받은 회중시계가 그의 무의식에 남아 강력한 상상력으로 현실보다 생생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다.
리처드와 엘리스 두 사람의 강렬하게 연결된 눈빛이 뭉클하다. 로맨스 영화 최대의 매력은 연인의 감정이 내 것처럼 느껴질 때다. 현실의 리처드가 갈망한 그 무엇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강렬한 유대와 신뢰, 완전한 사랑. 사람이 꿈에서 꿈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어? 이것은 여기 있을 수 없는 물건인데..' 인지하는 순간 현실 같던 꿈은 깨진다. 리처드가 1979년 동전을 보는 순간 1912년 그 세계에서 튕겨 난 것처럼. 꿈이 아니라면 정말 어딘가에 이상적인 현실이 존재할까? 리처드가 쓴 연극처럼, 사는 동안 내내 고통받는 사람은 종내 바라던 바를 얻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