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동방불패>, <와호장룡>
동생은 <토요 명화> 오프닝을 들으면 세상에 종말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신문지가 바람이 날리는 텅 빈 거리가 연상된다고. 만약 지구 최후의 날이 온다 해도 자신만은 영원하고 싶다는 것이다. 동생의 기분을 이해했지만 또렷하게 이기적이구나 했다. 혼자만 살겠다는 건가?
전기가 끊기고 지반이 흔들릴 정도로 지구에 변고가 있다면 홀라당 사라질 수밖에 없잖아? 그때 나는 상상력이 빈곤하여 다정하게 동생을 다독이지 못했다. 둘 다 철학책 좀 읽었다면 우주의 비밀과 존재에 대하여 근본 없는 대화를 했을 것이다. 서로 궤변을 늘어놓아도 안전한 관계니까.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주인공 서래가 정말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스스로 한탄하거나 서글퍼서 울 때는 그 눈물이 뜨겁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때조차 나라면 어떨까 상상하며 제 설움에 울었다. 그런데 100% 영화 속 인물의 슬픔 때문에 마음이 저리다니. 아픈 느낌이 미역처럼 서서히 불어난다. 흐른 눈물은 온도가 낮고 눈이 붓지 않았다. 이 증상(?)에 대한 설명이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 씨 인터뷰에 나온다.
(스포일러)
무표정도 다채로운 탕웨이는 눈동자가 크리스털을 품고 있는 것처럼 빛난다. 한 번 마주치면 그 눈빛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 바라 볼 정도로. 탕웨이가 연기한 서래와 상대역 해준(박해일 분)을 보면 인물 구도와 정서가 같은 영화가 있다. 동방불패(임청하 분)와 영호충(이연걸 분). 절벽에 매달린 영호충을 동방불패가 매처럼 스쳐갈 때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튄다. 동방불패 역시 붕괴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을 마음에 담은 대가로. 물리적으로도 철저하게 무너지고 깨졌다.
서래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바닷가로 향하고 동방불패는 아찔하게 높은 흑목애에서 하강한다. 무공을 가진 고수인지라 낙하산을 탄 것처럼. 자살하는 그가 마지막으로 바란 것은 상대가 영원히 자신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오! 붉은 옷자락과 깊은 눈매의 당신은 연인을 박제하고 떠나는군요. 고운 모래를 적시는 물결은 부드럽지만 차갑게 서래를 감싼다. 구덩이 속 서래의 결연한 눈빛을 보니 임청하의 삼라만상을 압축한 눈빛이 포개진다.
<와호장룡>의 엔딩에도 같은 심상이 있다. 옥교룡(장쯔이 분)은 무수한 계단을 올라 무당산 꼭대기에 이른다. 정상에는 운명의 상대가 있다. 그녀의 진심은 인간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 옥교룡은 높이를 알 수 없는 산에서 뛰어내린다. 안개를 부드럽게 가르면서. 남겨진 나소호(장첸 분)는 사는 동안 숙면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에서 극단적인 세 여인의 남자들은 나이 들지 않는 소년 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밀물이 허리까지 들어차도 해준은 첫사랑을 잃은 소년처럼 서래를 찾는다. 영호충은 추락사를 무릅쓰고 모호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사막 밤하늘에 홀로 뜬 별 같은 나소호는 짝을 만난 후에야 반짝였다. 그는 이전처럼 기세 좋은 마적으로 살았을까? 모래바람에 속절없이 풍화되었을 것만 같다.
해가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 조명 천 개가 켜진 듯한 빛살이 해변을 채운다. 나는 영원할 수 없으나 영원하기를 욕망한다. 인간은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기억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인간은 때로 목숨을 대가로 치른다.
지금이라면 동생이 했던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 사회생활을 계속했으니 널 기억할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다고 할까? 쌓인 모래가 주저앉듯 부질없다. 그렇다면 애써 기른 자식은 어때? 가장 오래 기억해 줄 것 같지만 때로 부모로서의 나를 완전히 잊어줬으면 한다. 가감 없이 내보인 결점 때문에. 부드럽게 모래를 쓸고 가는 파도를 한없이 바라보게 된다. 욕망이 깎이고 깎여 마침내, 무엇을 원했는지 잊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