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시절, 차돌처럼 야무졌던 H
1학년이 된다는 것은 항상 앳된 느낌이다. 중학교 입학하던 날도 그랬다. 1층 교실 밖 복도에 가족들이 꽃다발을 들고 종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반 학생 모두 선생님 말씀 하나하나에 긴장하고 앉아 있다. 번호순대로 자리가 정해져 있고 나는 8번이라 첫 줄 끝에 앉았다. 책걸상도 예쁘고 연한 나무색이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새 책가방이 걸린 책상을 쓸어보는데 갑자기,
"누나야~!!"
엄마에게 안겨 있던 열 살 터울 남동생이 복도에서 창문을 활짝 연 것이다. 그때 4살이었구나. 개월 수로 30개월! 까만색 겨울 잠바를 입은 아기가 해맑게 나를 찾았다. 담임 선생님은 웃어넘겼던 것 같고, 창문을 일단 닫았다. 집에 돌아가기 전, 꼬깔콘 엎어놓은 모양의 나무가 늘어선 교정에서 사진을 찍었다. 며칠 전에 내렸을 하얀 눈이 나무에 끼얹어져 있다. 공기가 차서 동생 어깨를 살짝 감쌌고 그 애는 작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30대였던 엄마가 갈색 코트를 입고 미소 짓고 있다. 아빠는 출근하셨을 거고 여동생은 등교해서 학교에 있었을까? 그즈음까지도 국민학교였다.
그리고 '장차 나는 철학과를 가면 좋겠다' 중얼거리며 자신이 다 큰 줄 알았던 국민학교 6학년은, 다시 1학년 애송이가 되어 큰 코를 다치게 된다..
90년 대 초였다. 여자아이들만 모여있고 등교할 때 두발 단속을 했다. 교복 셔츠에 채우는 타이가 없으면 '반항'이었고 머리띠를 하면 선도부가 바로 빼갔다. 귀밑 3센티 단발에 실핀만 허용. 이때 비주얼은 엄마가 중학교 다닐 때와 판박이였다. 교복에 색감이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교실 셋째 줄이나 맨 뒷자리를 차지하는 청소년들은 학교 규칙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자기만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마지막 승부> 심은하의 볼륨 있는 앞머리는 청순했지만, 여드름 여학생이 스프레이까지 몰래 뿌려 완성한 앞머리는 사마귀 앞다리보다 위협적이었다. 시킨 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래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날라리 수준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기가 활달한 십 대 1500명을 일괄적인 외양으로 묶어 놓았으며 그들 대부분 고분고분했다는 것이 놀랍다.
모여 있으면 드러난다. 누가 수학을 잘해서 물어볼 만한지, 누가 이 반 실세인지. 그건 반장이라고 저절로 생기는 힘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2학년 때 등교를 띄엄띄엄하는 일진이 있었는데, 다행히 다른 반이었다. 다른 반이었으나..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그 반 아이들이 웅성거리면서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고 일진이 어떤 아이 머리채를 잡고 있는 모습을. 날라리 정도가 아니라 진짜 폭력을 쓰는 일진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청소년 폭력이 묘사된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떨었다. 영화보다 잔인하게 느꼈던 중학교 때 겪은 그날 때문이다. 말리는 친구도 없고 교실 뒤쪽 마루에 나동그라진 아이와 얼어붙은 애들을 향해 삿대질하던 일진. 비위에 거슬리면 이 애처럼 된다는 엄포였던 것 같다. 순간 나는 외쳤다.
"그러면 안 돼!"
곧바로 돌아서서 도망갔다. 일진이 다음 타자로 나를 쫓아올 것 같았다. 찍히면 위험한(?) 시절이었다. 모두가 중학교라는 좁은 세상에 살았다. 곧바로 나의 외마디를 후회했다. 동시에 죄책감도 올라왔다. 지금도 아주 드물게, 이따금 떠오른다. 바꾸고 싶은 기억처럼 저장된 영상이 수정되어. 이랬다면 어땠을까. 제대로 도와줘야 했지 않았을까. 수정본 카메라 시점에서 나는 둘러싼 애들을 양쪽으로 밀치고, 교실 바닥에 주저앉은 이름 모를 그 애의 머리카락을 일진의 손아귀에서 떼어낸다. 그다음은 무서워서 상상하기 힘들다.
일진에 속하는 녀석들은 귀신같이 약점이 눈에 띄는 아이를 공격했다. 전교 1등이나 반 1등처럼 공부를 잘하면?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수학을 포기하기 전이라 내 평균은 평균적. 어중간한 나의 도발은 애매하게 끝났다. 찜찜했지만 중학교 시절은 그대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3학년 때 반장이었던 H의 어떤 행동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체육복을 입고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H가 맞붙은 아이는 내 기억으론 일진이다. 그 애가 장난 삼아 작은 돌멩이를 주변에 던진 것 같다. 물론 돌이라 맞으면 아프다. 아프면서도 말 못 하고 참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중단시키지 못했다. 찍히면, 골치 아프니까. 그런데 H도 그 돌에 맞았다. H는 이마가 알밤처럼 야무지고 긴 머리는 다람쥐꼬리처럼 한 갈래로 묶었다. 아. 그새 두발 단속은 완화되었나 보다. 격동의 90년대. 돌을 던진 일진이 앉은자리로 H는 척척 걸어왔다. 안 보는 척하면서 반 아이들 모두 그 애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일진 앞에 착 앉은 반장 H는 망설임 없이 말한다.
"네가 이거 던져서 맞았어. 조심해. 아프잖아."
모두 놀라서 그 둘을 쳐다보았다. 더 놀라운 건 일진 그 애가 곧바로 사과한 것이다. H는 예쁘고 반장인 데다 공부까지 잘했지만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니었다. H의 박력에 허가 찔린 것이다.
"아.. 어.. 미안해."
일진은 더 이상 돌을 던지는 '장난'을 하지 않았다. H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저 작은 집단의 작은 소란 같지만 그날 H로 인해 나는 두고두고 영향받았다. 두려움 없이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 내면이 단단한 사람. 작은 일일 수록 분명히 하는 사람. 이후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내가 전학 간 이후로는 소식이 멀어졌다. 그러다 아이러브스쿨 덕분이었는지 H와 통화한 적이 있다. 그 애가 교육 쪽으로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H는 내가 신뢰하는 인간상이다. 그 애라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조직에 있든 꼿꼿한 마음으로 살 것이다. 심지 굳은 친구 H는 무력했던 내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 그 친구는 내가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딛고 일어설 기반이기도 하다. 사람은 성장할 때 존경하는 역사 속 위인이나 책에 등장한 캐릭터에 감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인간의 기본 조건을 심은 사람은 동화 속 공주님이나 마리 퀴리, 무협소설 주인공, 서울대 합격담 속 공부 천재도 아닌 용감한 반장, H다. 사소한 태도에서 한 사람의 전체를 느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