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는 수학적으로 사고하기를 원한다

생각을 도형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

by Gomsk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에 4개의 성냥개비로 6개의 정삼각형을 만들라는 수수께끼가 나온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여백에 요상한 도형을 그려가며 앓았다. 책 어느 지점에서 정답은! 하고 나올지 모르니 집중해서 마저 읽을 수밖에. 복잡한 문양으로 인해 미로에 빠졌다가 마침내 정답을 읽었을 때, 그 충격파로 뇌가 미세하게 부풀었다. 프라이팬에 크레이프 반죽을 넓고 얇게 부치듯 생각한다고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층부가 존재했다. 개미 인간이 하늘을, 3차원을 처음 인지한 순간. 그때 나이가 약관.. 에 가까웠으니, 직립 보행한다고 저절로 입체적인 사고를 하는 건 아니었다.


누름돌로 쓰기 위해 구매한 것이 틀림없을 600쪽 이상되는 책은 분량만 많은 것이 아니고 텍스트 한 문장, 한 단락마다 이중삼중십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에 허영심이 동반되어 분기별로 산 것이다. 일단 책 등을 노려본다. 그대는 왜 존재하나요.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가요. 왜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는 솜사탕 같은 말로 얘기해 주지 않나요. 그다음은 책날개를 펼쳐서 작가와 번역자 소개글만 읽는다. 모든 사물은 공기가 통해야 하니까. 두꺼운 책 혹은 시집처럼 얇은데 내용의 밀도가 중성자별 같아 더 속상한 요물 같은 책들이 도로 책장에 꽂힌다.


분명히 세상에는 상온에서도 딱딱한 물성을 유지하는 울릉도 호박엿같은 텍스트를 이해하고 파고들어 교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정도 감을 잡은 이상 물러날 수는 없어서 책장을 노려본다. 지성의 세계는 잘 익은 수박처럼 식칼 집도 한 번에 쩍 갈라져 단면을 속 시원하게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감을 잡은 사람. 감을 잡은 자는 그 감의 원천을 알고 싶은 마음에 감에 감을 더하여 제대로 감잡을 때까지 가지고 있는 감을 믿고 가는 것이다. 어디로?


부경복 씨가 쓴 <손석희가 말하는 법>은 그 쪼개짐을 선사한 책이다. 쪼개짐이란 감 잡으러 떠난 행려병.. 아니 여행자에게 힌트를 주었다는 것. 저자는 손석희 씨가 100분 토론이나 뉴스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할 때 보여준 화법을 도형에 비유했다. 1차원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본능에 충실하고 놓인 상황에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분노를 불러오기도 하고 내장까지 상대에게 굳이 보여주는 싱거운 결과를 가져온다. 바로 나의 패턴이다. 복수심에 열정을 불태우거나 현재 상태를 모면하기 위한 노력만 한다.


그래서 지성과 사고력 수준을 목소리로 드러내는 화술을 입체도형에 비유한 것을 읽고, 전류가 흐르는 책상에 멋모르고 엎드렸다가 이마에 전류가 흘러 화들짝 정신이 통째로 튕겨나갔다. 손석희 씨는 상대가 주장하는 내용의 대척점을 비춰 무력화시킨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을 이미지로 떠올렸고, 인간의 지성을 도형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아니 감 잡았다. 작가 이지성 씨는 본인의 지성을 원뿔 모양 같다고 했다. 그건 방대한 지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명료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생각은 다면체인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종족의 사제가 나를 찾아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진리를 재차 알려준데도 지구에 살고 있는 나는 일단 여기까지다. 이 지점에서 가장 애타는 것은 수학이다. 나는 수학 빵점자였으나 수학적 사고의 신비로움과 개운함에 대해 맛보고 싶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나오는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분)처럼 "아름답지 않네?" 하며 궁극의 미학에 빠져보고 싶다. 데카르트는 좌표로 세상을 이해하면서 하이웨이를 달리는 짜릿한 기분이었을까. 수학자 라마누잔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사원 바닥에 수학 공식을 미친 듯이 그린다. 수학이 음악이 되고 미술이 된다. 지금도 십만 원인지 백만 원인지 0 개수를 손가락으로 세는 수포자지만, 나는 원한다. 수학적 사고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수학이라는 다리 건너 만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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