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배신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는 게 아니다. 기억은 항상 업데이트된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 느낌, 생각이 우리의 과거를 계속 편집하고 있으며, 현재의 변화가 클수록 우리의 과거 역시 더 많이 편집된다.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126p
여러분은 기억을 얼마나 확신하시나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내 기억이 달라 당혹스러웠던 적은 없으신가요?
혹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하면 막상 떠오르지 않아 민망했던 적은 없으신가요? 내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기억이 실은 뇌가 지어낸 거짓 기억이라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안다는 느낌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내 기억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평생 동안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한 낯선 풍경부터 부모님과 나눈 대화나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까지. 이 모든 순간은 우리 머릿속 한편을 빼곡히 채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나 책에서 배운 방대한 지식까지 더해지면 그 양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억,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저장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우리 뇌의 놀라운 능력인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믿고 있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우리가 굳게 믿어온 '기억'이라는 실체를 들여다보려 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뇌가 그려낸 모조품이다.
첫 직장 면접 날, 결혼식, 첫 아이가 태어난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났던 순간. 인생에 중요한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선명하게 남습니다.
반면, 분명 정확한 시간을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다른 날짜로 얘기했다며 약속이 어긋났을 때. '내가 그랬을 리 없어'하며 문자 기록 뒤져보니 내 말이 틀렸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워집니다. 혹은 어릴 때 가봤다고 얘기했던 곳인데 알고 보니 TV에서만 봤던 곳이라는 것을 알게될 때. 이런 민망한 경험, 다들 한 번쯤 해보지 않으셨나요?
왜 우리의 기억은 이토록 불안정하게 설계된 것일까요? 이것은 뇌가 선택한 생존 전략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이것은 비단 자연 현상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라고 믿던 과학적 사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릴 적 배웠던 명왕성은 이제 더 이상 행성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AI로 인해 그 속도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기억이 처음 상태에서 수정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아마도 2026년의 지금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10년 전 추억 속의 동네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들고 현재의 도시를 탐험할 수 없듯이, 기억 또한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합니다.
내 머릿속의 기억은 비디오카메라에 찍힌 원본 영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야기로 엮고, 다시 꺼낼 때마다 그 순간의 맥락과 감정에 맞춰 업데이트해,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그려낸 '정교한 모조품'입니다.
기억은 끊임없이 바뀐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연구팀은 기억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 진행했습니다. 17명의 참가자에게 168개의 물건 위치를 외우게 한 뒤, Study(학습), Refresh(재현), Recognition(인식) 세 단계의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과정은 이렇습니다. 학습 단계에서는 다양한 배경에 놓인 168개의 물건(12개 배경 x 14개 물건)의 위치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어서 재배치 단계에서는 새로운 배경화면을 제시하고 그 위에 물건을 원래 위치에 놓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새로운 배경화면이 영향을 미쳐 참가자들 물건을 조금씩 틀린 위치에 놓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회상 단계에서 다시 원래 배경화면을 보여주고 물건의 원 위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절반 이상의 참가자가 2단계에서 잘못 놓았던 위치를 원래 위치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 최초의 데이터가 불안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뇌는 저장된 기억을 떠올릴 때 그 기억을 말랑말랑한 찰흙처럼 바꾸어 현재 경험을 덧붙이기 쉬운 상태로 내보냅니다. 이는 기억의 정확성을 포기해서라도 미래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뇌의 똑똑한 전략입니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강물은 계속 흐르고 있고, 그 사람 또한 이전의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뇌는 과거 경험과 감정을 단순히 저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수정합니다. 기억은 한 번 찍으면 수정할 수 없는 사진이 아니라, 끊임없이 덧칠되는 그림과 같습니다.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라!
기억은 세상을 그대로 저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장면 위에 그동안의 경험과 감정을 덧칠하며 끊임없이 업데이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주관적인 기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실험은 기억이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교통사고 영상을 보여준 뒤 속도를 추정하게 했습니다. 이때 질문에 사용된 단어에 따라 그들의 기억 속 자동차 속도는 달라졌습니다.
"차들이 '부딪혔을(Hit)' 때 속도는?" → 평균 시속 54km
"차들이 '박살 났을(Smashed)' 때 속도는?" → 평균 시속 65km
단어 하나가 같은 영상을 본 사람들의 기억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기억은 외부의 자극 하나에도 쉽게 휘둘립니다. 그러니 '이건 진짜 확실해'라는 생각이 들 때 한 번만 더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내 기억이 틀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요.
내 기억이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할 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결 편안해질 것입니다.
기억도 삶도 시시각각 변한다.
변화하는 계절처럼 내 기억도 매일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억은 실제 일어났던 현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 내 기억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어떤 기억이 진실에 가까운 거지?'라는 생각에 혼란스러우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제 실수했던 일은 오늘 새롭게 고치면 됩니다. 과거에 힘들었던 기억은 극복의 스토리로 다시 써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어제는 잠시 내려놓고, 오늘 만들어 나갈 새로운 기억에 집중하세요.
[참고문헌]
- 김대식 (2015).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 문학동네.
- Bridge, D. J., & Voss, J. L. (2014). Adaptive memory reconsolidation supports normative memory updating. Journal of Neuroscience, 34(6), 2434-2441.
- Loftus, E. F., & Palmer, J. C. (1974). Reconstruction of automobile destruction: An example of the interaction between language and memory.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13*(2), 585-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