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사는 아이들 편에 서다
놀이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또 다른 나’는 친구일 수도 있고, 어른일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으며 둘레의 친한 물건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거기에 있는 바람일 수도 있고 온도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친구와 어울려 큰소리를 내며 뛰고 달리며 세상의 가운데에서 자기를 알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는 이의 얼굴빛도 환해진다. 아이 혼자서 논다고 혹은 멍하게 앉아 있다고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아이도 분명 지금 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살리는 중요한 순간을 살고 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생존의 방법을 배운다.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 그 순간을 잘 살피면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아이들이 친구와 어울려서 노는 놀이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어른들은 걱정을 늘어놓는다. 어울려서 함께 노는 것은 나와 또 다른 나를 몸으로 만나는 것이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나의 몸 쓰임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놀면서 서로를 자세히 보고 듣고 느끼듯이 어른들도 아이들의 한 호흡, 한순간을 잘 살펴보면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아이의 입장에서 함께 놀 수 있다.
함께 놀기 위해서는 서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야 한다. 이기는 방법에 대해 합의해야 하고 놀이판에서 죽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서로 제안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생기면 놀이를 멈추고 또 이야기해야 한다. 이때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자분자분 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삐쳐서 울거나 화가 나서 놀이판을 떠날 수도 있다.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규칙과 변화하고 진화하는 규칙이 놀이를 살아있게 만든다. 이 과정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첫걸음이고, 아이들은 자기를 내어놓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이때 어른들이 개입하여 일방적으로 규칙을 제시하고 심판 역할을 한다면, 이 놀이판은 아이들의 놀이판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시간이 되고 만다.
함께 놀기 위해 꼭 필요한 세 가지는 때(時間)와 곳(空間)과 친구(人間)이다. 시간, 공간, 친구가 있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논다. 간혹 어떤 놀이를 어떻게 할지 몰라 자기에게 익숙한 것(핸드폰 게임, 책 읽기, 무작정 발길질하기, 흙먼지 만들기, 짜증 내기)만 고집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때 어른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참견한다. ‘놀아주기’, ‘놀이 가르치기’, ‘놀이 연습시키기’, ‘놀라고 말로 잔소리하기’ 등이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건 놀고 있는 엄마, 아빠,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기’이다. 아이들이 함께 놀기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길이다. 어른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저절로 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음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노는 모습에 잔소리하고 참견하며 서서히 자기들의 놀이로 가져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과 어른들은 어느새 편을 나눠 경쟁하며, 흥분하고 소리치고 급기야 싸우기까지 한다. 놀이가 만들어 주는 최고의 장면이 아닌가? 평등과 평화와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놀이판에서는 저절로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놀이판이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주도할 수 있는 놀이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똑같은 발언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놀이 유전자의 회복
그런데 어른들이 놀지 않는다. 마을을 달리고 산을 뛰어넘고 강을 잡고 골목을 호령하던 놀이 대장은 어디로 갔을까? 주머니 가득 잘그락거리는 구슬이며 잘 접은 딱지를 가득 채우고 어깨를 으쓱이던 아이는 외계에서 온 소년이었나? 자기 키를 훌쩍 넘는 고무줄을 발로 낚아채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던 소녀는 딴 세상으로 가버렸나? 손이 보이지 않는 빛의 속도로 공깃돌을 쓸어 담던 아이들은 그 힘을 어디에 다 주었을까? 이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살고 있는데 놀이 능력만 잃어버리는 이상한 음식을 먹은 것일까?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숨어 버린 놀이 유전자를 다시 살려 내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어른들 자신을 위해 놀이 본능을 적극적으로 살려내야 한다. 지금의 어른들도 새로운 생각, 재미있는 생각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기상천외한 낙서를 하고 지붕 위를 달리고, 아슬아슬한 담장 위를 눈을 감고 걷고, 인도와 차도 분리대를 평균대로 여겨 중심 잡기 놀이를 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놀이 능력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생존 능력이기도 했지만, 마을의 놀이 선배들을 보고 따라 하면서 얻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보고 따라 할 동네 형들이 없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따라 전래놀이, 추억의 놀이라는 이름으로 놀고 있지만, 그 놀이는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 방법과 규칙을 만들어 내는 대신 TV 속 그들이 노는 것처럼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들은 놀이의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면서 누군가 던져주는 놀이에 익숙해진다. 어른들이 놀이 유전자를 살려내어 함께 놀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엄마, 아빠, 교사가 아닌 동네 노는 형이 되어야 한다.
전국의 여러 가족을 1년 동안 주말마다 만났다. 제기차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사방치기, 고무줄놀이 등 어른들이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로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어른과 함께 온 아이들은 자기를 다 내어놓고 신나게 놀았다.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다양한 놀이를 익히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가며, 공부를 강요하던 부모님과 같이 노는 경험은 아이들을 흥분하게 했다. 이 시간 동안 어른들은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닌 놀이를 알려주는 놀이 선배가 되었다. 어른들은 어릴 적 추억을 아이들에게 쉼 없이 들려주고 아이들과 함께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놀았다. 가족이 함께 놀이여행을 하면서 아이들은 놀이를 몸으로 배우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숨소리와 팔 길이에 맞춰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갔다.
아이들은 놀고 또 놀아야 한다. 그것이 아이들의 일이다. 자기 몸속에 있는 놀이 유전자를 살리고 채우며 또 다음 대로 연결한다. 건강한 놀이 유전자가 이어질 수 있도록 아이와 어른 모두 시간을 가지고 즐겁게 놀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른들이 먼저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