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덴마크 포크하이스쿨을 만났을 때
덴마크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서의 시간이 왜 내게 '밍숭맹숭'하게 느껴졌을까?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자문해 본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요인은, 바로 넘치도록 주어지는 자유시간이다.
숙제도, 시험도 없는 기숙형 학교인 '포크하이스쿨(FolkeHøjskole)'인 IPC에서는 정해진 시수의 수업에만 출석하고 나면 그 외에는 늘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다. 풀벌레 소리와 넓은 잔디, 아름다운 연못을 끼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캠퍼스에서의 자유시간이라니, 너무 좋을 거 같은데? 라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이다.
슬프게도, 나는 그곳에서 자유시간을 가장 자유롭지 않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넘치도록 주어진 자유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곳에 ‘유학’까지 왔으니 뭔가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비좁고 어둑한 지하의 도서관을 울적한 표정으로 드나들었다. 그곳에선 노트북을 켜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한국인들과(요즘 스타벅스에 가면 볼 수있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과 영단어공부에 열중하는 일본인 무리가 주로 눈에 띄었다. 또 한 부류가 더 있긴 했는데, 화창한 날씨에 이들이 컴컴한 지하 도서관에서 뭘하고 있는지 궁금해 문을 빼꼼이 열던 여타 다른 문화권의 학생들이었다.
한국에서 공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 '학교'라는 단어를 주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고 하면 어떤 것을 머리에 떠올릴까? 나의 경우엔 '네모난 학교 건물', 그 안의 '교실'이 먼저 떠오르고 '시험', '수업', '선생님', '일렬로 배치된 좁은 책상과 걸상', '교과서' 가 잇따라 그려진다. (경험안에서 모든 것을 상상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하지만 덴마크 포크하이스쿨에 이런 이미지를 적용한다면 십중팔구 예상과 어긋날 확률이 크다.
포크하이스쿨의 진가는 개설된 수업만으로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수업은 단지 학교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 할 뿐이다. 포크하이스쿨에 머무르는 동안은 교사를 비롯한 학교의 다양한 스탭진들(주방, 행정, 건물관리 등등)을 포함해 100여명의 친구들과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이들과 제 2의 가족과 같은 안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적게는 3개월 많게는 6개월간 생활하는 동안 이루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게 된다.
학생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다양한 빛깔로 채워 나갈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편안히 먹고, 자고, 일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학교 뒤뜰의 나무에서 포도와 사과를 따고, 케이크를 구우며.
맥주를 마시고 캠프파이어를 한다.
교실에 모여 토론하고, 선생님과 농담을 나누고, 숲에서 거닌다.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벽난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마디로 덴마크 포크하이스쿨을 정의해 보자면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현재를 누릴 수 있는 시 공간' 그 자체다. 이는 내 상상력 안에 자리한 학교와 매우 다른 모양이었다. 넘치게 주어지던 자유시간을 '허송세월', '잉여로움'으로 바라보았던 나로서는 이렇게 넉넉한 시간을 즐길만한 상상력도, 여유도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수업에서만 의미있는 배움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휴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일의 하수인' 정도의 지위로 여겼던 내가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 전환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언젠가 치뤄어야 했던 관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교실 안에서 일방적으로 수업을 듣는 시간들이 절대적으로 많은 기존의 학교와는 달리 친구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이 풍성하다 보니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평생을 기쁜일과 어려운 일을 나누는 친구로서 삶 속에 깊이 자리 잡는 경우가 많다. '평생친구'를 넘어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경우도 잦을 만큼 관계가 밀도있게 형성된다. 얼마전에도 IPC 출신의 헝가리인 친구가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한국인!)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옛날엔 댄스 파티에서 만나 결혼에 이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반려자를 소싯적 포크하이스쿨 다닐때 만났다는 중년의 스텝분들도 있었다) 이쯤 되니, 단순히 배움을 소비하려고 했던 내 지저분한 양심이 조금씩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