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유방암만 아니면 됩니다."
깜깜한 방 안에선 의사가 입은 하얀 가운 만이 빛이 났다. 날 안심 시키려는 투였지만 나는 환자복을 풀어헤친 가슴 위로 묵직한 근심이 얹어진 느낌이었다. 비교적 젊은 의사로 보이는 그는 '맘모톰*'이라는 기계를 내 몸에 가져다 대며 이어서 말했다.
“유방이라는 장기가… 난소도 그렇고요. 모유 수유할 때나 아이를 가질 때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기관인데, 탈이 나면 여성들은 심리적 박탈을 많이 느끼더라고요. 사실 이게 심장이나 폐, 간 같은 다른 기관에 비해 활용도가 지대하지는 않은데도 말이에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직장에 출근했던 내가 직장인 건강검진 결과를 전화로 통보받은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 해 생애 처음으로 유방 촬영*을 했던 나는 상급 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얼떨떨하기만 했다. 혹이 만져지거나, 통증이 있다거나 하는 증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누워 있는 환자에게 내미는 그 나름의 위로라지만 의사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새삼 의식하게 되는 건조하고 위태로운 말이었다. 늘 나와 붙어 지내던 개인적인 차원의 내 몸이 생전 처음 보는 의료인의 입을 통해 생물학적인 '장기(organ)로 낯설게 번역되는 이질적인 순간이었다. 의사는 그러니까, '젖 분비를 통한 영양공급'이라는 유방의 주된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이었다. 문제는, 내가 감각한 이 상황이 의사가 파악한 그것보다 훨씬 크고 중대하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요즘은 좋은 기계가 많아서 조직검사를 하더라도 절개하지 않고 조그만 바늘을 찔러 조직을 채취한다고 했다. 그래서 반차를 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용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맘모톰 기계는 생각보다 크고 소리도 컸다. 브로슈어에 적혀있는 ‘아주 작은 바늘 하나’가 아니라 공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굉음을 일으키며 작동하는 에어타카를 연상시키는 기계였다. 눈앞에 매달린 화상을 통해 바늘이 몰캉몰캉한 살점 사이를 깊게 헤집는 것이 보였다. 시술은 마취가 잘 안 되는 바람에 마취주사를 한 대 더 맞고서야 끝났다. 의사는 곧장 떠났다. 이제 남은 일은 간호사의 몫이었다. 거울을 통해 보니 바늘이 들어갔다 나온 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즈로 꾹 눌러 지혈을 했지만 환자복 앞섶이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간호사는 몸을 더욱 내 쪽으로 기울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의 체중을 실어 구멍을 압박했다. 어둠 속에서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간호사가 내 가슴통을 압박붕대로 아주 단단히 싸기 시작했다. 피는 붕대 아래로 꺼져 들어가고, 눈물은 서서히 솟아올랐다. 점점 걷잡을 수 없어진 눈물이 내 몸통 앞뒤로 분주히 오가는 간호사의 손등에 떨어졌다. 주변을 살피던 간호사가 “이곳엔 이것밖에 없어서…”라며 거즈를 한 움큼 쥐어주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받아 든 시술비 영수증에는 간단한 시술이라던 의사의 설명과는 달리 200만 원이라는 간단치 않은 금액이 적혀 있었다.
때는 11월 29일, 겨울이 한창이었는데 입고 간 점퍼의 지퍼가 잠기지 않았다. 가슴부위를 압박한 붕대가 턱 아래까지 솟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경험, 낯선 기분을 어서 벗어나 다시 익숙한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몇 시간 전과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비대칭과 불균형의 세계로 불시착한 느낌이었다. 한쪽 팔이 마비되거나, 한쪽 다리가 불편하거나,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첫날이기도 했다.
잠기지 않는 점퍼 사이로 파고드는 추위를 느끼며 습관처럼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퇴근길의 사람들로 이미 꽉 찬 버스를 몇 차례 보내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 택시를 잡아 탔다. 집으로 향하는 길, 마취가 풀리기 시작해 시큰거리는 가슴을 어색하게 끌어안고 깜깜한 뒷좌석에서 줄곧 울었다.
*맘모톰(Mammotome)은 유방 조직의 이상 부위를 진단하거나 치료할 때 사용하는 유방 조직 검사 장비이다. 특히 유방에 작은 종양이나 혹이 발견되었을 때 조직을 채취하거나, 크기가 작은 양성 종양을 제거하는 데 사용된다.
*유방촬영(Mammography)은 유방의 내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X선을 사용하는 영상 검사이다. 유방을 두 개의 플레이트 사이에 놓고 강하게 압박하여 촬영한다. 유방암 조기 발견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